2019. 5. 8. 23:41ㆍ역사
조선 왕조
이성계의 등장
이성계의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가 여진의 남경(간도)에 들어가 원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차차 그 지역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고 아들 행리, 손자 춘이 대대로 원나라의 관리를 지냈으며 춘의 아들 자춘도 원의 총관부가 있던 쌍성의 천호를 얻었다. 그러나 원이 고려출신의 이주민들에 대해 원주민과의 대우를 달리하기 위해 차별호적을 만들어, 차별 정책을 실시하자, 이자춘은 원에서 등을 돌려 고려를 돕기로 결심한다. 당시 원은 명에 의해 중원으로 밀려나자, 공민왕은 반원 정책을 실시하여 동북면의 쌍성총관부와 긴밀한 관계가 있던 기씨 세력을 제거하려 했고, 이자춘은 이러한 공민왕의 의도를 간파하고 1355년 공민왕을 만나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치면 자신이 돕겠다고 약속한다. 이자춘은 동북면의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4년 후인 1360년 병사하고, 그의 차남 이성계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쟁을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위화도회군과 4대 불가론
고려가 요동을 공격하기로 한 것은 명이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는데다 철령이북 땅이 원의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 속해 있었으므로 당연히 원을 몰아낸 명의 소유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고려를 명의 속국으로 삼겠다는 말이었다. 이에 고려 정부는 크게 반발하였고, 급기야 1388년 2월 최영을 중심으로 명의 전초기지인 요동을 정벌하고자 했다. 이에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고,좌군도통사에 조민수,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임명하여 그 해 4월 요동정벌을 감행했다. 요동정벌 - 1388년.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5만 대군이 5월에 위화도에 당도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강을 건너 요동성을 공략할 계획이었다.하지만 장마로 압록강 물이 엄청 불어나 강을 건널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이성계는우왕에게 요동정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것이 유명한 사대불가론으로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리는 일은 옳지 않으며
둘째, 여름철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으며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 고 주장하자,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요동 정벌을 독촉하자,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한 뒤 개경을 향해 회군을 단행해 최영 군대와 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여 최영을 유배시키고 우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보내고 조민수의 주장에 따라 창왕을 옹립한다.
조민수와 이성계 일파는 조정을 장악한 뒤 각각 좌시중과 우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조민수가 차기 왕으로 창을 내세우는데 반해 이성계는 우왕과 창이 신돈의 자손이기 때문에 왕씨 일족중에서 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의견이 양립되자 조민수는 목은 이색에게 조언을 구해 공민왕의 정비 안씨에게 국새를 맡겼고 안씨는 아홉 살인 우왕의 아들 창으로 하여금 왕위를 물려받게 한다. 그러나 창왕은 이듬해 11월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 당하고,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창을 등극시킨다. 그가 바로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다.
공양왕은 즉위하자마자 폐위된 우와 창을 죽인다. 또한 창왕을 옹립했던 조민수는 대사헌 조준에게 탄핵되어 창녕으로 귀양가게 되자 이성계일파는 고려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조민수가 실각하자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은 가속화 되었고 마침내 1392년 7월, 조준, 정도전,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에 힘입어 이성계는 왕으로 등극하고, 공양왕을 강등시켜 원주에 유배시킨다. 이 부문에서 극작가인 신봉승씨는 제5공화국의 등장과 비슷하다고 한다.
이로써 고려왕실은 34왕 474년으로 막을 내렸고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원주,간성, 삼척 등을 떠돌다가 1394년 이성계의 명에 의해 처형되었다.
제1대왕 : 태조 이성계(1335-1408. 재위기간: 1392.7-1398.9. 집권 6년2개월 76세)
1392년 4월 공양왕의 스승이자 수문하시중으로 있던 정몽주가 방원의 사주로 살해되자 이성계는 그 해 7월에 공양왕을 내쫓고 마침내 정도전, 조준,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로 고려 국왕으로 등극하고, 1393년 3월 명의 양해를 얻어 국호를 조선으로 정했다. 또 무학과 정도전으로 하여금 새 수도를 물색 케 하고 무학의 의견에 따라 한양을 새 수도로 삼는다. 이성계는 개국 후 법제 정비를 서둘러 1394년에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비롯한 각종법전이 편찬되었다. 또 숭유 억불정책을 시행하여 서울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전국의 사찰을 폐하는 등 불교를 탄압하였다.
이성계는 즉위한 직후에 왕세자 책봉을 서둘러, 계비강씨 소생인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결정하자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높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성계의 등극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방원은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방번도 함께 살해했다. 이성계가 와병 중에 일어난 사건으로 그는 몹시 상심한 나머지 그 해 9월에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이성계는 방원에게 옥새를 넘겨주지 않은 채 소요산으로 떠났다가 다시 함흥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는 방원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2년 후인 1402년에 한양으로 돌아와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덕안전을 새로지어 정사로 삼고 염불삼매의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1408년 5월 창덕궁 별전에서 향년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이성계는 3명의 아내에서 13명의 자식을 얻었다.
신의왕후 한씨
신덕왕후 강씨 - 그녀는 신의 왕후 한씨와는 달리 권문세가에서 태어났으며,태조의 집권 거사에도 참여했을 뿐 아니라 조선 개국이후에도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태조는 그녀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삼자 한씨 소생들과 대립하게 된다.
1396년 사망 후 시호는 신덕왕후 능호는 정릉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성계가 죽은 후에 태종은 몇차례 걸쳐 이장을 단행했으며, 그녀에 대한 왕비의 제례도 폐하고 서모에게 행하는 기신제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200년 뒤 현종 때 송시열의 주장에 따라 강씨는 다시 종묘에 배향 되고 왕비의 기신제도 복구되었다. 한편 태종은 이성계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에 대한 불만으로 강씨의 무덤을 여러 차례 이장했고, 정자각을 헐고, 십이지신상 같은 석물을 실어다 청계천 돌다리를 만드는 등 강씨에 대한 노골적인 불노를 표출했다.
방석 1382년-1398년 - 조선 개국 원년에 세자 책봉 문제가 일어났을 때 배극렴 등이 방원의 세자 책봉을 주장했으나, 이때 왕비 한씨는 죽고 없었기에 계비 강씨의 의향에 따라 태조는 무안군 방번을 세자로 세우려 하였다. 하지만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 개국공신들은 방번이 성격이 광망하고 경솔하다며 방번의 세자 책봉은 반대했고,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방석은 어머니 강씨의 보살핌과 정도전, 남은 등의 지원에 힘입어 세자로서의 자질을 익히고 있었다.
하지만 강씨가 죽고 태조마저 병석에 눕게되자 그의 배후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었고 이 틈을 타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난을 일으켰고, 이 난의 성공으로 세력을 잡은 방원은 방석을 유배시키고 방번과 함께 살해했다. 후에 세종의 여섯째아들 금성대군이 방석의 후사를 이었으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에 실패하고 32세에 처형되자 후사가 완전히 끊겼다.
새 도읍지 한양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하자 무학과 정도전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왕성을 옮길 계획을 세운다. 일차적으로 계룡산을 새로운 도읍지로 확정하여 왕성건립을 시작했다. 그러나 계룡산은 지역이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하다는 하륜의 주장에 따라 도읍지는 다시 한양으로 변경 되었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왕이 서경인 평양과 남경인 한양에 궁궐을 짓고 돌아가면서 머무르면 국운이 크게 융성한다는 지론에 따라 숙종 5년인 1101년 북악산 기슭에 궁궐을 짓기도 했다.
일찍이 도참사상의 대가로 잘 알려진 신라의 고승 도선은 '한양은 전국 산수의 정기가 모두 모이는 곳이기에 반드시 왕성이 들어 설 것이며, 왕성의 주인은 이씨가 될 것' 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에 고려왕조는 이를 염려하여 고려 중엽에 윤관으로 하여금 북악산 남쪽에 오얏(자두)나무를 심었다가 그것이 무성하게 자라자 베어 버리게 했다. 즉 오얏李의 성한 기운을 없애 이씨가 왕조를 세우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한양으로 도읍지는 정해졌지만 궁터만은 쉽게 정하지 못했다. 하륜은 모악산 아래 지금의 신촌으로 무악은 인왕산을 진산으로 하고 북악과 남산을 좌우의 용호로 삼아야 한다고 했지만, 정도전은 대왕은 남으로 향하는 법이지 동향을 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라고 하면서 북악산 아래쪽을 극구 주장했다. 이에 무악은 화산인 관악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곳에 궁을 앉히면 관악산의 화기가 뻗쳐 우환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정도전은 관악의 화기는 한강이 막아 낼 수 있다는 지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정도전의 의견을 채택하여 북악산 아래에 왕성을 짓고 궁궐을 남쪽으로 향하게 했으며,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불을 잡아 먹는다는 전설의 동물인 해태석상을 경복궁 앞에 세웠다.
정몽주 1337년 - 1392년. 연일정씨
정몽주는 1337년 경상도 영천 땅에서 한미한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살이에 나간 20세 후반에 이색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색에게서 성리학을 열심히 배우고 현실개혁에도 눈을 떴다. 특히 정몽주는 자기보다 연하인 정도전을 아껴 그에게 '맹자'를 선물로 주며 학문을 권장하기도 했다. 정몽주는 조정에서 촉망받는 벼슬살이를 이어갔다.
그러나 정몽주·정도전 등은 신진 세력이었기 때문에 권신들과 잦은 마찰을 빚게 되었다. 또 이들은 유학자 출신이었기에 불교도와도 분란을 일으켰고, 친명파였기에 친원파와도 정적의 관계가 되었다. 정도전이 이러한 면에 대하여 급진적이었다면 정몽주는 온건적 입장이었다.
1375년(우왕 2), 권신인 이인임 일파에 대해 탄핵하면서 정몽주는 경상도 언양에서 귀양살이를 2년 했다. 귀양에서 풀려난 후 그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기도 하고 제학 등의 벼슬을 받아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몽주는 조전원수로 이성계를 따라 공을 세우기도 했다. 다시 1383년 이성계와 함께 북쪽 오랑캐 방비에 나서 공을 세웠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이성계와 사귀게 되었다. 정몽주는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정도전을 서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이성계와 정몽주의 도움으로 정도전은 대사성 등의 벼슬을 누렸다.
1388년 최영과 이성계는 요동정벌에 나섰으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최영 등 보수세력을 제거하고 집권했다. 이어 우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신진세력의 기반을 확실하게 했다. 이때 정몽주와 정도전은 각기 좌익·우익에서 이성계를 도왔다.
차츰 이성계는 실세로 부상하였다. 더욱이 이들 신진 세력은 이성계의 명망을 업고 새로운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곧 조준·남은·정도전 등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이때 정몽주는 소외되고 있었다. 이에 그는 이들 급진세력을 제거하려는 생각을 굳혔다. 1392년 세자가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성계가 마중하러 황주로 가는 길에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정몽주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겼다.
정몽주는 대간을 통해 정도전·조준·남은 등을 탄핵하고 죽이려 하였다. 이때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급히 이 사실을 이성계에게 알렸다. 이성계는 정몽주를 제거하기도 결정하였다. 이 사실을 들은 정몽주는 이성계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이성계 집으로 찾아갔다.
이방원이 정몽주의 심중을 떠보려할 때 정몽주는 '단심가'로 대답했다. 자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아버지의 의중을 안 이방원이 수하장수인 조영규를 동원하여 선죽교에서 죽였다. 그리고 정몽주 세력들도 완전 제거되었다. 때는 1392년이었다.
조선 개국을 이끈 사람들
새왕조를 꿈꾸는 혁명가들 - 개혁론자들은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고 새로운 왕조를 주창해야 한다는 역성혁명론자들과,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성리학 사상을 중심으로 고려를 개혁해야 한다는 고려개혁론자로 나뉘어진다. 역성혁명론의 대표격은 정도전 이었고, 고려 개혁론의 대표격은 정몽주였다.
이들은 모두 이색의 문하에서 동문 수학한 사이였지만 대립은 결국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역성혁명론자들의 승리로 끝난다. 이성계는 군권을 쥐고 있었지만 변방세력이었기에 언제나 전쟁터로 내몰렸으며, 최영은 중앙의 권력을 잡고 있었다. 때문에 이성계는 새 왕조를 주창하겠다는 의지는 그다지 강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출신성분 탓에 능력과 상관없이 배척의 대상이 되었고, 항상 주변의 세력으로 머물러야 하자 힘이 있는 이성계를 찾아가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것을 역설했고, 정도전은 사상적인 부분에서, 무학은 이성계 개인의 인성과 천명론을 들먹이며 그를 부추겼고, 결국 이들의 설득과 논리가 이성계의 불만과 일치되면서 비로소 조선의 개국으로 이루어 지게 된 것이다.
정도전 : 이성계를 통해 성리학적 이상국가 건설을 꿈꿈. (1342년 경북 영주출생, 62세)
그는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 물리력으로 왕조를 교체할 수 있다는 맹자의 역성혁명론을 주장하였고,이미 국운이 기울어가던 고려왕조를 폐하고 성리학 통치 이념으로 한 새로운 왕조를 꿈꾸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미미한 벼슬을 유지해오다가 아버지 정운경에 이르러서 비로소 직제학이라는 중앙관리로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서얼 출신의 노비였다. 이런 출신 배경 때문에 동문수학 했던 벗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고 출세에 엄청난 걸림돌로 작용하자 역성혁명을 꿈꿀 수 밖에 없었던 이유로 작용했던 것이다. 아버지 정운경이 이색의 아버지 이곡과 친구였던 덕으로 이색 문하에서 글을 배울 수 있었으며 거기서 정몽주, 이숭인 등과 교분을 가졌다. 24세인 1360년 성균시에 합격하고 그 후 성균관 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과 함께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유학을 강론했다.
1375년 이인임 등 친원세력과 맞서다가 나주 목에 유배되었으며 2년 뒤에 유배지에서 풀려 난 뒤로는 낙향하여 4년간 칩거하다가 한양으로 가서 삼각산 밑에 초가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주변 유학도들의 방해로 서재를 철거당하고 다시 김포로 이사했다. 이렇게 유랑 생활을 하던 정도전은 1383년 이성계를 찾아가 인연을 맺고 그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에 오른다.
이후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에 성공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조준 등과 함께 전제 개혁안을 건의하고, 조민수 등 구세력을 제거하여 이성계가 조정을 장악하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이듬해 정몽주 등과 함께 우왕의 아들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좌명공신에 봉해지고, 1391년 삼군도총제부 우군총제사가 되어 병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그 다음해 봄 이성계가 사냥중에 낙마하여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정몽주 등의 탄핵을 받아 또 다시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정도전을 탄핵한 실제 목적은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한 것 이었다. 이러한 정몽주 일파의 정치적 공략에 위기감을 느낀 이방원은 급기야 정몽주를 살해하는 등의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자,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풀려 나와 그 해 7월에 조준,남은,방원 등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마침내 조선을 개국하였다.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여 새로운 법제도의 기틀을 닦았으며 경제문감을 저술하여 재상, 대간, 수령, 무관의 직책을 확립했다. 또한 명의 곡물 요구가 거세지자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군량미확보, 진법훈련, 사병혁파 등을 적극 추진해 병권 집중운동을 펼쳐 나간다.
경제문감별집을 저술해 왕이 나갈 길을 밝혔으며,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숭유억불 정책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의 이같은 노력은 사병혁파에 위기를 느낀 방원의 무력동원으로 중도에서 좌절되고 만다. 정도전의 세력이 날로 강해지자 방원은 자신의 형제들과 힘을 합쳐 그를 제거해버렸다.
정도전은 어린 세자 방석을 교육시켜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꿈꾸었지만, 왕권과 자신의 입지가 약화 되는 것을 두려워한 방원은 사병을 이끌고 내습하여 그를 살해하고 세자 방석도 죽였다.
정도전은 자신을 한나라의 장량에 비유하며 한 고조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해 한나라를 세웠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해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했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지나친 자부심이 결국 그의 죽음을 자초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조선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역성혁명론에 입각해 이성계로 하여금 조선을 개국하게 했고, 한 나라의 근본이 되는 법제를 확립하고 민심을 수습 키 위해 천도를 단행했다. 조선개국의 이념인 유교사상을 사회 속에 확립시켰고,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 정치를 내세워 왕의 바른길을 가르쳤다. 명의 곡물요구가 지나치자 요동 정벌론으로 맞서며 정치적 독립을 실행했고, 병권 집중화운동으로 군권을 안정시켰다.
태조와 강비 그리고 정도전의 방원에 대한 지나친 경계와 냉대, 이것이 화근이 되어 조선왕조는 개국 초장부터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감내해야 했다.
무 학 : 이성계에게 군왕이 될수있다는 확신을 심어 줌. 1327년 경남 합천 출생. 79세.
대몽항쟁의 명장 박서의 5대손으로 알려졌다. 무학의 부모는 고려말 당시 해안지방에 자주 출몰하던 왜구에게 끌려가다 간신히 탈출하여 안면도에서 갈대로 삿갓을 만들어 팔던 하층민이었다. 때문에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해서 그의 행적은 출가 이후 일부만이 겨우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무학은 출가한지 몇년 후에 원으로 유학하여 인도 출신의 고승 지공스님을 만나 선불교를 배웠고, 또한 원에 유학 중이던 나옹 혜근스님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후에 나옹은 공민왕의 왕사로 봉직하고 있었다. 나옹은 무학을 전법제자로 삼았지만 나옹의 제자들은 그가 천민출신이라 이를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옹은 문도들의 반대로 그에게 의발을 전수 하지도 못하고 전법제자임을 알리는 시를 한 수 지어준다. 그는 공양왕의 왕사 책봉도 받아들이지 않고 나옹의 곁을 떠나 오랫동안 토굴에서 수도생활에만 전념했다. 하지만 이성계를 만난 뒤부터 그의 삶은 달라진다.
천문지리와 음양도창설에 밝았고, 파자점과 해몽 술에 능했다. 그를 찾아온 이성계가 問자를 짚어보이자 어느 쪽으로 보나 君이라 하며 그가 장차 임금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는가 하면, 꿈에 서까래 세 개를지고 왔다는 이성계의 말을 듣고 그것은 임금王자라고 하여 후에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성계는 그를 스승으로 대했고, 조선개국 이후에도 왕사로 받들었다. 무학은 태조의 왕사로 있으면서 조선의 안정을 위해 새로운 왕도를 정하는 일과 왕궁을 건축하는 일에 가담하는 등 노년의 거의 전부를 조선의 건설에 쏟았다. 1405년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조선 개국의 주체 이면서 그 기득권을 전혀 주장하지 않았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제2대왕 : 정종. 1357년-1419년 재위기간 : 1398년 9월-1400년. 11월. 기간 2년2개월 61세.
정종은 원래 왕위에 뜻이 없었다. 세자 책봉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도 그는 "당초부터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업적은 모두 방원의 공로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수있느냐"?고 반문 하며 세자 되기를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방원의 양보와 권유로 세자로 책봉되었고, 1개월 후 태조가 물러나면서 왕위에 올랐다. 비록 왕좌에 있긴 하였으나 권력이 방원의 손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정종 때의 정치는 거의 방원의 뜻에 따라 진행 되었다. 1399년 한양의 지형에 문제가 있다 하여 수도를 다시 개경으로 옮겨갔으며 분경금지법을 제정 관인이 왕족과 외척들에 의존하는 것을 금지하여 권력을 가진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그 후 제2차 왕자의 난 이 일어나자 방원을 세제에 책봉했고, 왕족 및 권력가들의 사병을 혁파하고 병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시켰다. 또한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치면서 삼군부에 직을 두고 있는자는 의정부에 합좌하지 못하게 해 정무와 군정을 분리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은 왕권 강화를 위한 것으로 모두 방원의 영향력 하에서 이루어졌다.
1399년 집현전을 설치하여 장서와 경적의 강론을 담당하게 했으며,태조 때 완성된 향약제생집성방을 편찬하였고 노비 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노비의 변속을 관리했다. 정종은 재위시에는 정무 보다는 격구 등 오락에 탐닉했는데, 이는 그 나름의 보신책 이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방원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 났다. 그는 상왕으로 물러난 뒤 주로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가 왕위에서 물러난 19년 후인 세종 원년에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는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묘호도 없이 공정대왕으로 불리다가 1681년 숙종7년에 비로소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모두 8명의 부인에게서 15남 8녀를 얻었다.
제1차 왕자의 난 : 1398년 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반대파 세력을 불의에 습격하여 살해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동복형 방번을 죽인 사건을 제1차 완자의 난이라 한다.
1396년 세자 방석과 정도전의 배후세력인 신덕왕후 강씨가 병으로 죽자, 방원의 정계복귀노력은 한층 가속화 되자, 그간 꾸준히 병권 집중운동을 벌여 오던 정도전 일파는 1398년 진법 훈련 강화를 내세우며 왕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방원과 정도전의 대립은 불가피해졌다. 사병은 방원의 마지막 보루였던 셈이고, 정도전은 사병만 해체하면 정적의 기세를 완잔히 제거하는 셈이었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자 방원은 극약처방을 내려 방석과 정도전 일파를 살해하기로 결정하고 정도전 일파의 밀모설을 만든다. 즉 정도전, 남은 등이 밀모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속이고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후 일거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후 일거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방원은 이것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사병을 동원, 정도전 일파를 습격해 살해하고, 세자 방석은 폐위하여 귀양 보냈다가 방번과 함께 살해했다. 태조는 이때 와병 중이어서 내막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뒤늦게 방석형제가 살해당한 사실을 알고는 무척 상심하여 왕위를 내놓고 말았다.
제2차 왕자의 난 : 방원은 정도전에게 병권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제거했지만, 자신이 권력을 잡자 세력강화를 위해서 왕족들의 사병 혁파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400년. 동복형인 넷째 방간이 박포와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난을 일으키자, 방원과 그의 사병들이 조기에 진압, 이일로 방원은 세제 자리를 확보. 방원의 심복 하륜의 주청으로 정종은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어 1400년 2월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고 11월에 왕위를 물려줬다.
태상왕이 된 태조 이성계는 옥새를 넘겨주지 않은 채 소요산으로 떠났다가 다시 함흥에 머물렀다. 이때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남. 태조가 물러난 것은 타의에 의한 면이 짙다. 이미 조정은 방원의 세력이 포진해 있었고 태조는 와병 중 이라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태조는 방원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2년 후인 1402년 한양으로 와 불도에 증진. 1408년 5월 24일 창덕궁별전에서 74세로 죽음.
제3대왕 : 태종 이방원 1367년-1422년. 재위 : 1400년11월-1418년 8월. 17년10개월.
제2차 왕자의 난이 평정되자 방원의 심복 하륜의 주청으로 정종은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어 1400년 2월에 방원을 세제로 책봉하고 이어 11월에 왕위를 물려주었다.
방원은 세제로 책봉되자 병권을 장악하고 중앙 집권의 틀을 다져 나갔다.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를 삼군 부로 집중시켰으며 도평의사를 의정부로 고쳐 정무를 담당하게 했고 중추윈을 삼군부로 고쳐 군정을 맡게했다. 이처럼 방원은 세제 시절에 이미 왕권 안정책을 마련하고 고려 정치문화의 잔재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정무와 군정을 분리하고 1400년11월 마침내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왕으로 등극 했다. 수도를 개성에서 다시 한양으로 옮겼으며 호구법을 제정하고 호패법을 실시하여 호구 와 인구를 파악했다. 그는 왕으로 등극하자 왕권 강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에 한층 박차를 가했고, 중앙제도와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고려잔재를 완전히 청산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해 국방을 강화하고 토지, 조세제도의 정비를 통해 국가 제정을 안장시켰다. 노비제도를 새롭게 정비하고, 신문고 등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자유롭게 청원케 하는 등 새로운 사회 정책을 실시하여 민심을 수습하였다. 태종은 교육과 과거제도 정착에도 역점을 두어 귀족위주의 관리 등용제도를 혁파하고 능력과 실력 위주로 관리를 등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에 주력했다. 태종은 이처럼 국가 전반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고 조선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정책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 정치는 그가 상왕으로 물러날 때까지 지속되었고, 이러한 개혁에 힘입어 세종대에는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나기 전인 1418년 장자인 양녕대군이 절제없이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세자에서 폐하고 충령대군을 세자로 삼아 2개월 뒤에 왕권을 이양했다. 태종은 재위 18년 동안 네 차례나 선위파동을 일으켰고, 상왕이 된 뒤에도 군권에 참여하여 심정, 박습의 옥을 치죄하고 병선 227척, 군사1만7천여 명으로 대마도를 공략하는 등 1422년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칠 때까지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태종은 12명의 부인과 29명의 자녀를 두었다.
태종의 선위 소동
태종은 재위 6년(1406) 8월 하늘의 재변이 잇따르자 자신이 부덕한 탓이라며 세자 이제(李?·양녕대군)에게 양위하겠다고 선언했다. 태종 못잖은 정치 고수인 신하들이 이것이 그의 본심이 아니란 사실을 모를리 없었다. 태조 이성계의 이복동생 이화와 영의정부사 성석린이 원로들과 백관을 이끌고 여러 날 동안 명의 환수를 요청하자 태종은 마지못해 받아들였고 소동은 끝났다.
그러나 1년 후 태종의 처남 민무구·민무질이 선위 소동 때 “기뻐하는 빛을 얼굴에 나타냈다[喜形于色]”는 등의 이유로 이화 등 백관과 대간들의 집중적인 탄핵을 받은 끝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태종 10년(1410) 3월 유배지에서 목숨을 끊어야 했다.
양위 소동의 행간을 읽는 정치 식견이 부족했던 탓이다.
원경왕후 민씨 : 본관은 여흥이며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 1365년에 태어났다. 태종보다 두살 위였던 민씨는 태종의 집권에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주었고, 1398년 8월 그녀는 정도전 세력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태조가 몸이 불편하여 여러 왕자와 함께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몰래 불러내어 정도전 일파의 급습 가능성이 있다고 주의를 환기 시켰고 방원은 그녀의 정보 덕분에 선수를 쳐서 정도전 일파를 제거할 수 있었다. 태종은 외척세력의 권력분산과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후궁을 늘려 나갔고 민씨는 이에 노골적인 투기와 불평으로 태종의 비위를 건드렸다. 이것이 곧 그녀의 동생 민무구 형제에게 영향을 미쳐 태종과 틈이 더 벌어지는 결과를 낳았고, 급기야 민무구 형제가 죽게 되자 그녀는 그 일로 태종에게 불손한 행동을 계속해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날 처지에 직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태종은 세자와 왕자들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해 끝내 그녀를 폐비 시키지 않았다. 원경왕후 민씨는 1420년 56세를 일기로 죽었다.
양녕대군 : 자유분방. 사냥과 풍류를 좋아함. 스스로 왕세자 자리를 거부해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고하나 정확 치 않음.
1418년 세자에서 폐위 69세 사망.
효령대군 : 동생 충령이 세자에 책봉되자 스스로 불교에 심취 그는 효성과 우애가 지극. 세종.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6대왕에 걸쳐 91세까지 삶. 왕의 연고 존친으로 극진한 대우와 존경을 받음.
충녕대군 : 세종.
성녕대군 : 14세 때 홍역으로 죽었다.
태종시대의 주요 5대사건
민무구 형제의 옥 - 태종은 제위 18년 동안 네 차례의 선위파동을 일으켰는데, 제1차 선위파동이 민무구 형제의 옥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407년 태종이 선위를 표방하자 민무구,민무질 형제는 어린 세자 틈에 끼어 집권을 획책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그러나 진짜 원인은 태종과 왕후사이의 불화였다. 이 때문에 외척 세력으로써 아버지 민제와 왕비의 권세를 믿고 활개를 치던 민씨 형제들은 불만을 품게 되고, 태종이 선위 할 뜻을 비치자 세자인 양녕을 찾아가 그런 불만을 토로한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옥이 발생하게 된다. 옥이 발생한 후 이틀 만에 태종은 민무구를 연안에 방치했으며, 공신녹권을 빼앗고 직첩을 수취하여 민무구 형제를 서인으로 전락시키고 여흥으로 유배시켰다.
태종은 정비 민씨와 장인 민제 장모 송씨의 면목을 생각해 가급적 생명만은 보전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민씨형제는 유배 중에도 대간 등의 논핵을 가중시킬 행동을 자주 하다가 결국 1410년 자진하였다.
민무구, 무질 형제가 죽은 후 그의 형제들이 형들의 억움함을 호소하자 태종은 무휼,무회 형제도 사사시켰으며 그들의 처자도 변방으로 내쫓음으로써 민씨 일가의 옥사는 종결되었다.
육조조직 단행 - 태종은 1405년 의정부 기능을 축소하고,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로 이뤄진 육조장관들의 품위를 정3품에서 정2품으로 높였다.
1414년 태종은 육조직계제를 단행했고 그 때까지 왕-의정부-육조 체제이던 국정이 왕-육조 로 전환되면서 왕권과 중앙 집권이 강화되어 왕조의 안정을 이루게 된다.
거북선의 개발 - 태종실록의 태종 13년에 보면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 해전 연습을 하는 모양을 보았다'라는 구절이 있다. 태종15년에는 좌대언 탁신이 '거북선의 전법은 많은 적과 충돌 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 없으니 결승의 양책이라 할 수 있으며, 거듭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가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거북선은 왜구 격퇴를 위한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일종의 장갑선으로 짐작된다. 거북선은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고려 말기에 고안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문고 설치 - 시정을 살피고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유롭게 청원할 수 있도록 한 제도였다.
태종은 훈신과 재상이 중심이 된 정치를 극복하고 백성의 안정된 삶을 통한 국가의 안정과 국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구현하려고 했다. 신문고는 태종의 이런 정치 사상의 일환으로 시행된 제도이며,1401년 송나라의 등문고를 본따 설치했다.
한양으로 다시 천도 - 태조 3년에 개경의 기운이 다 됐다는 이유로 한양으로 천도했다가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은 개경으로 옮겨갔다. 태종은 등극 하자마자 태조의 뜻을 이어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신하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해 실행치 못하다가 1405년 창덕궁이 준공되자 한양천도를 단행하였다.
태종 대에는 이 사건들 외에도 호구법을 제정하여 호패법을 실시하였으며, 포백세와 호포세를 폐지했고, 환자치료를 위해 처음으로 동녀를 선발하여 부인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태종시대의 세계 약사
1402년 보헤미아의 프라하대학 총장이 된 후스는 로마교회의 부패상을 고발하며 종교개혁을 시도하려다가 발각되어 신성로마제국에 의해 쫓겨난다. 이후 다시 보헤미아 공화국에서도 파문된 후스는 1412년 로마교회가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을 비판하고 이 때문에 그는 파문당하고, 1414년 콘수탄츠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선고받고 이듬해 화형당한다. 이 사건이후 1417년 교황 베네닉트 13세가 폐위되고 마르틴 5세가 즉위해 5개조의 개혁조령을 발표함으로써 종교개혁의 기운은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해 나간다.
제4대왕 : 세종 충녕대군 : 1397년-1450년 재위:1418년 8월-1450년 2월. 집권31년6개월.
태종은 재위기간 중 네 번에 걸쳐 선위 파동을 일으킨다. 첫 번째는 그의 건강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무구 형제가 어린 양녕을 포섭하여 협유집권을 도모하려 했다는 탄핵사건이 일어나 민무구의 옥이 발생하면서 태종은 선위 문제를 뒤로 미룬다. 이후에도 태종은 선위 파동을 세 번이나 계속된다. 이것은 자신의 건강에 대한 불안감과 조선의 안정을 이루기 위한 계획과 자신이 일찍 상왕으로 물러나
왕이 성장할 때까지 왕을 보좌하면서 왕이 정사를 처리할 능력이 생기면 군정의 안정에 주력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태종은 세자인 양녕을 신뢰하지 않았고, 태종의 양녕에 대한 불신감은 급기야 세자를 폐하는 극단적인 조치로 나타났다. 1418년에 일어난 이 폐 세자 사건이 네 번째 선위 파동으로 이때 황희 등 조정 대신들 중 일부는 폐 세자를 반대하다가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업적과 안정된 왕권을 양녕이 제대로 이어 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무렵 양녕은 궁중을 몰래 빠져나가 풍류생활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궁중 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에 태종은 수 차례에 걸쳐 그에게 심한 벌을 내려 군왕이 지켜야 할 덕행을 쌓도록 타일렀지만, 양녕은 태종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태종의 마음이 양녕에서 떠났음을 간파한 신하들은 마침내 세자를 폐하자는 의견을 내놓았고, 1418년 유정현 등의 청원으로 마침내 양녕은 폐위 되었다. 그리고 왕세자의 지위에는 셋째 아들 충녕대군 도가 올랐다. 그가 바로 조선 4대왕인 세종이다.
태종은 충녕이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등도 잘 안다 면서 세자에 책봉했다.
이처럼 태종은 충녕의 학문과 능력을 높게 평가하였기에 일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충녕에게 왕위를 넘겨 주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휼륭한 유교정치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 모범이 되는 성군으로 기록되었다.
세종은 태종이 이룩해놓은 왕권의 안정을 바탕으로 정치,경제,문화,사회 전반에 걸쳐 기틀을 확립했다. 세종은 태종이 죽은 1422년 이후부터 놀라운 정치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세종대에는 개국 공신세력이 거의 사라졌고 그 덕분에 과거를 통하여 정계에 진출한 유학자와 유학적 소양을 지닌 국왕이 서로 만나 왕도 정치를 꿈꿀 수 있었다.
세종 시대의 권력 구조나 정치적 양상은 세종 19년을 분수령으로 두 시기로 구분된다. 세종은 이 때를 전후하여 국가 기강의 중심이었던 육조직계제를 의정부서사제로 변혁하여 왕에게 집중되어 있던 국사를 의정부로 넘기는 한편, 세자로 하여금 서무를 결제하도록 하는 등 이전에 비해 더욱 유연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왕권 중심의 정치 형태인 육조직계에서 의정부서사제로 바꾼 것은 젊은 시절부터 당뇨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정무가 과다한 육조직계제는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집현전은 고려시대에 이미 설치된 기관으로 조선 정종 시대에도 설치된 일이 있었지만 세종초에 이르러 기능이 대폭 확대되었다. 세종은 명과의 사대관계를 원만히 수행하기위해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 그리고 이를 지속하기 위한 정치적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에 따라 집현전은 젊고 유망한 학자들이 채용되었고 그들에게는 여러 가지 특전이 주어졌다. 집현전 인재들은 주로 책 편찬 사업과 훈민정음 연구 사업에 투여되었다. 그리하여 민간에서 쓰던 고어와 외국의 언어를 연구하여 훈민정음 체계를 완성했으며 농사직설을 비롯한 실용서적과 역사, 법률, 지리, 문학, 유교, 어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이 설치되어 '혼천의'같은 천체관측 기계를 만들었으며, 해시계는 앙부일구,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등이고 물시계는 자격루와 옥루가 있었다. 해시계를 일咎라고 한 것은 이것이 모두 해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세계최초의 강우량계측기인 측우기 등을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국토의 개척과 영토의 확장을 통하여 국력도 신장했다. 김종서가 두만강 방면에 육진을 개척했으며, 압록강 방면에는 사군을 설치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박연을 통해 아악을 정리케 하고 금속화폐인 조선통보를 주조했다.
세종은 천부적인 능력과 뛰어난 인성 그리고 넓은 덕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의 역사적,문화적,정치적 기틀을 닦아 놓고 1450년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세종은 정비 소헌왕후 심씨를 비롯해 6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그들에게서 18명 4녀를 얻었다. 능은 영릉으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다.
소현왕후심씨 1395-1446년. 본관은 청송 심씨로 영의정 심온의 딸이다.
심씨의 아버지 심온이 세종 즉위초에 영의정에 올라 사헌사로 명나라에서 귀환하던 중, 아우 심정이 군국대사를 상왕인 태종이 처리한다고 불평을 했다가 옥사가 일어 났다. 심온은 이 사건의 수괴로 지목되어 수원으로 폄출되어 賜死 됨.이 때문에 심씨를 폐하자는 논의 가 있었으나 그녀의 내조의 공이 인정 되어 폐비사태는 면하였다.
안평대군 1418년-1453년 세종의 셋째 아들.
함경도에 육진이 신설되자 1438년 왕자들과 함께 야인을 토벌하였으며, 권신,황보인,김종서등 문신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수양대군측의 무신세력과 맞서 인사행정인 "황표정사"를 장악하는 등 조정의 배후 신력자로 부상하였다.1452년 단종이 즉위한 후, 수양대군은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오고 난 뒤 황표정사를 폐지하였다. 안평은 이에 반발하여 황표정사 회복에 주력했으나 이듬해 계유정난으로 황보인 김종서 등이 살해된 뒤 자신도 강화도로 귀양갔다가 교동으로 옮긴 후 36세를 일기로 사사되었다.
안평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서,화 모두에 능해 삼절이라 불리었고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명성을 떨쳤다.
금성대군 1426년 - 1457년 소헌왕후의 여섯째 아들. 방석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과 함께 사정전으로 불려가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왕을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수양대군이 정권을 탈취하자 이에 반발하여 삭녕에 유배되었다.
이후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당하자 자신의 유배지였던
순흥에서 부사 이보흠과 함께 모의하여 단종복위를 세우다 관노의 고발로 실패로 돌아가 반역죄로 처형
당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1791년 정조15년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을 편정 할 때에 육종영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세종시대를 빛낸 사람들
희대의 명재상 황희와 맹사성
황희:1363년-1452 년 90세. 영의정
1363년 개성에서 태어난 황희는 불과 14세 때 음보로 복안궁녹사가 되었고, 21세에 사미시에 ,23세에
진사시에, 4년 뒤인 1389년 27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에는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황희는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였지만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돌아왔다.
이후 태조와 태종의 신임을 받으며 성장을 거듭했다. 실록에 의하면 태종은 황희는 공신은 아니지만 공신대접을 하였고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 접견하였고 하루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하였다.고 할정도로 특별히 그를 신임했다. 태종시절에 이미 이조판서에 올랐다.
1418년 양녕대군 폐위에 반대하다가 태종의 진노로 유배 세종4년 유배에서 풀려 관직에 돌아올 수 있었다.황희는 성격이 분명하고 정확 강직했으며, 1449년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87세라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영의정 직에 머물러 있었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세종의 정치에 조언했으며 세종 사후에는 문종의 치세에 도움을 주었다. 그는 청렴하고 학덕이 높았으며 사리에 밝고 치밀한 사람이었다. 성품이 너그럽고 예법 및 임기응변에 뛰어났다. 인권을 존중하여 노비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은 그야 말로 선비중의 선비였다.
황희가 학자적 인물이었다면 맹사성은 예술가적 인물이었다. 그래서 황희는 주로 병조, 이조 등 과단성있는 업무에 능했고, 맹사성은 예조, 공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다.
맹사성:1360년- 1438년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이조판서, 의정부 찬성사, 좌의정 등
맹사성은 황희가 두문동에 은거하는 것과는 달리 태조 때부터 예조의량직에 제수받는 등 관직에 그대로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승진을 거듭해 1408년에는 사헌부 수장 대사헌의 직책에 올랐다. 그런데 황희와 맹사성은 태종의 두터운 신임에도 불구하고 태종에 의해서 한 번씩 파직을 당하게 된다. 맹사성은 사헌부 수장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역모사건을 치조하는 중에 태종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부마인 조 대림을 고문. 이 사건으로 그는 왕족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처형 직전 까지 간다.당시 영의정 이었던 성석린과 황희의 도움으로 죽음 면했지만 그는 이 사건으로 3년 동안 관직을 떠나야 했다.
세종이 즉위하던 1418년에 맹사성은 공조판서에 올라 있었고 황희는 남원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 하여 예조, 공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함.예술가적임.
그는 평소에 소를 타고 다니기를 좋아했고,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기기도 했다.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몇 번이나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벼슬을 내놓았지만 세종은 한번도 그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다.
과학 혁명의 주창자 장영실
장영실의 태생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동래현에서 관노생활을 하던 중에 재주가 출중하여 천거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당시 세종은 과학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신분에 상관없이 기술적인 능력이 있는 인재들을 찾고 있던 중 이었고, 동래현의 재주있는 관노로 이름이 나 있던 장영실이 인재로 발탁되었던 것이다. 장영실은 발탁된 뒤 곧장 중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유학중 장영실은 천문기기에 대한 식견을 가지게 되었고 귀국해서는 궁중 기술자로 본격적인 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뛰어난 능력 덕분으로 이미 세종 5년에 노비 신분에서 면천 되었으며, 상의원별좌라는 직책도 부여받았다.그는 유학에서 돌아와 물시계를 만들어 정 5품의 벼슬에 올라 본격적인 천문학 연구에 매진했다. 이러한 천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장영실과 일군의 학자들이 해시계와 물시계, 측우기 등을 만들었다. 장영실의 과학적 업적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해시계의 하나인 앙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였다. 자격루는 장영실이 김빈과 함께 만든 것으로 중국과 아리비아의 것을 비교 연구하여 새로이 고안한 것이었다. 장영실은 자격루를 만든 공노로 대호군으로 승진했고, 이에 보답하기 위해 다시 태양 모양을 본떠 만든 천상시계와 물시계인 옥루를 만들어 궁중에 받쳤다. 옥루는 완전 자동시계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보적인 발명품이었다. 이처럼 장영실은 과학발전에 일생을 받친 조선시대 최고의 기술과학자였고, 천체의 원리뿐 아니라 자연 동력의 원리에도 밝았으며, 기계제작에도 뛰어난 면모를 과시하며 세종시대에 찬란한 과학 혁명을 이끌어 낸 선구자였다. 하지만 그의 노후 삶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있다.
음악의 귀재 박연 : 태종 대에 이조판서를 지닌 박천석의 아들로 1378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다.
34세에 비로소 진사에 등과해 집현전 교리 등을 지냈으며, 주로 사헌부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봉상판관 시절에 그는 음악적 능력을 인정받아 악학별좌를 겸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게 된 듯하다. 세종대의 음악적 부흥은 크게 아악의 부흥, 악기의제작, 향악의창작, 정간보의 창안 등으로 대변될 수 잇는데, 이는 모두 박연이 이룬 것이었다. 그는 노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향악의 발전에 최선을 다하다가 1458년 81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농사직설을 집필한 정초
농사직설은 곡식재배에 필요한 수리, 기상, 지세 등의 환경 조건도 상세히 기술하여 농민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곡식을 재배하면 유리한지 알 수 있게 했다. 이 책의 특징은 풍토가 다르면 농사법도 달라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정초의 이러한 농업관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와 육진을 개척한 김종서
김종서:1390년생. 16세 되던 해인 140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415년에는 상서원직장을 지냈으며 태종신록 편찬을 주관한 세종시대의 대표적인 문신이었다.이후 광주판관, 이조정랑 등을 거쳐 1433년 함길도 도관찰사로 육진 개척에 투입된 그는 약 10년 가까이 육진 개척에 전념하여 두만강을 국격으로 확정짓는 성과를 올렸다. 육진 개척 후 김종서는 경상 3도순찰사, 의정부 우찬성 등을 거쳐 문종 대에는 좌의정에 올라 대단한 위세를 떨쳤지만. 1452년 단종원년에 수양대군에 의해 살해되어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이종무:1360년생. 어릴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던 그는 1381년 아버지와 함께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한 공로로 무인으로 등용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는 방원편에 가담하여 방간의 군사를 괴멸시킴으로써 좌명공신 4등에 녹훈되었다. 이후 그는 좌군절제사, 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세종 즉위 다음해인 1419년에는 삼군도제찰사에 올랐다. 이 해 5월 왜선 39척이 비인현에 침입하여 병선을 불태우고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조정은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공략하기로 결정하고 이종무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대마도 정벌 후 대규모의 왜구는 사라졌으며 이를 통해 조선은 평화시대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는 대마도를 정벌 후 찬성사로 승진하였고 한때 대간들에게 탄핵되어 유배되기도 했지만 복관되었고, 이후 부원군에 진봉 되었다가 1425년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세종시대의 세계는 1419년 종교개혁 문제와 관련하여 신성로마제국에서 보헤미안전쟁이 발발한 이래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대부분의 국가들이 30년전쟁, 백년전쟁, 도시전쟁 등으로 전운에 휩싸여 있었다.
그 전란의 와중에서 프랑스의 잔다르크가 화형되었으며, 독일에서는 1455년 쿠덴베르크의 인쇄본이 간행되었다.
제5대왕 문종(1414년-1452년. 재위:1450년 2월-1452년 5월. 집권 2년3개월.)
문종은 세종 즉위3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어 29년 동안 왕세자에 머물렀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해 학자를 가까이 했으며 측우기 제작에 직접 참여했을 정도로 천문.역수 및 산술에도 뛰어났고 서예 에도 능했다. 성격이 유순하고 자상하여 누구에게나 호평을 받았으며 거동이 침착하고 판단이 신중하여 남에게 비난받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착하고 어질기만 하여 문약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1442년부터 1450년까지 8년간의 섭정을 통해 정치 실물를 익혔고, 여러 가지 치적을 남기기도 했다.
때문에 세종 후반기의 정치적 치적은 세자 향의 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관의 언론이 활성화되었고 6품 이하의 신하에 대해서는 윤대를 허락해 벼슬이 낮은 신하들의 말에 대해서도 경청했다. 이렇듯 유연함과 강인함을 곁들인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건강 악화로 제위 2년3개월만에 39세 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문종은 첫번째 빈궁으로 김씨, 두번째로 봉씨가 있었으나 둘 다 과실이 있어 폐위되었다. 순빈 봉씨가 폐출되자 권전의 딸이 세자빈으로 정해졌는데 그녀가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이다. 현덕왕후는 1441년 세자빈 시절에 단종을 낳고 3일만에 죽었는데, 그녀의 원혼이 수양대군이 왕권을 찬탈한 후에 궁중에 나타나 그의 가족들을 괴롭혔다는 얘기가 전한다. 그래서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가 그녀의 원혼에 시달려 죽었으며 세조 역시 꿈에서 그녀가 뱉은 침 때문에 피부병에 걸려 고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세조는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해 쳐 관을 파내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제6대왕: 단종(1441년-1457년. 재위 : 1452년 5월-1455년 윤6월. 집권 3년 2개월)
현덕왕후 권씨는 26세에 단종을 낳고 해산에 기력을 완전히 빼앗긴 탓으로 죽음을 앞두게 된다. 그녀는 세종의 후궁인 혜빈양씨에게 아들을 부탁하고 3일만에 숨을 거두었다. 이에 혜빈 양씨는 세손 홍위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자신의 둘째 아들을 품에서 떼어 유모에게 맡기기까지 했다. 이렇게 양육된 홍위는 8살 되던 1448년(세종30년)에 세손에 책봉된다. 세종은 홍위를 세손으로 책봉하고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유성윈, 신숙주 등의 집현전 소장학자들을 은밀히 불러 세손의 앞날을 부탁했다. 이는 세종자신 도 이미 병세가 악화돼 죽음을 얼마 앞두지 않은 처지였고 세자 향(문종)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할 것 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세종이 이런 간곡한 부탁을 한 것은 자신의 아들들 때문이었다. 특히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어릴 때부터 야심이 크고 호기가 많은 인물 이었다. 1450년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 하자 홍위는 세자로 책봉된다. 문종은 즉위 2년 3개월 만에 어린 세자를 부탁 한다는 고명을 남기고 병사하고 말았다. 이때 세자 나이 12세였다. 단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 하는 것이 일반적 이었는데, 대왕대비는 물론이고 대비도 없었으며 왕비도 없었다.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도맡았으며 왕은 단지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데 그쳤다.
“황표정사” - 대신들이 인사 대상자의 이름에 황색 점을 찍어 올리면 왕은 단지 그 점 위에 낙점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모든 정치권력은 문종의 유명을 받든 고명대신들인 황보인, 김종서 등에게 집중되어있었다. 이렇듯 왕권이 유명무실해지고 신권이 절대적인 위치에 이르자, 세종의 아들들 즉 왕족의 세력이 팽창 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왕숙들이(수양. 안평. 임영. 금성. 영응) 세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둘째인 수양과 세째인 안평은 서로 경쟁을 벌여 급기야 엄청난 피바람을 일으키고 만다.
계유정란 : 명목은 김종서가 황보인, 정분등과 부동하여 장차 안평대군을 추대하려는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다. 1453년 4월 명나라에 고명사로 갔다 돌아온 수양은 신숙주를 막하에 끌어들이는 한편 홍달손.양정 등 심복 무사를 양성하고, 한명회, 권람 등의 계책에 따라 김종서를 철퇴로 죽이고 영의정 황보인,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민신, 우찬성 이양 등은 왕명을 핑계로 대궐로 불러들여 참살당했다. 이들의 죄명은 안평대군을 추대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었다. 계유정란으로 고명대신들이 거의 참살당하자 조정은 수양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수양은 영의정에 올랐으며 또한 왕을 대신해 서무를 관장하는 등 왕권과 신권을 동시에 장악했다.
수양은 자신의 집권거사에 참여한 인물들을 정난공신에 봉하고 그들이 지칭한 난의 장본인인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 우직을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안평대군은 사사시키고 우직은 진도에 유폐시켰다.
중앙을 장악한 수양은 변방에 자신의 세력을 심기위해 함길도 도절제사를 교체하였다. 당시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던 이징옥은 이 소식을 듣고 신임 절제사로 부임하던 박호문을 참살하고 난을 일으켰다.
이징옥은 원래 4군과 6진 개척에 공로가 컸던 인물로 김종서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수양이 조정의 대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주변 인물들과 함께 수양을 치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종성판관 정종, 호군 이행검 등에 의해 살해당하고 이징옥의 난은 무위로 끝났다.
이처럼 정치적 실권이 완전히 수양대군에 의해 장악된 가운데 1454년 정월에 단종은 송수현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이듬해 윤6월 수양대군이 자기수하의 신하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인 동생 금성대군 이하 여러 종친, 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 시키자 위험을 느낀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 갔다.
이후1456년 6월에 상왕 복위 사건이 일어나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출신과 성승. 유응부 등 무신들이 사형 당했으며 이듬해 단종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 되었다. 그러나 1457년 9월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여 단종은 다시 서인으로 강봉되었고, 한 달 뒤인 10월에 17세의 나이로 賜死되었다.
계유정난의 배경과 사건 분석
당시 조정은 영의정에 황보인, 좌의정에 남지, 우의정에 김종서가 포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지는 건강이 좋지 않아 이 해 10월에 좌의정을 내놓게 되고 좌의정에 김종서, 우의정에 정분이 앉게 된다.
당시는 의정부서사제였기에 조정의 권력은 의정부의 삼정승이 쥐고 있었는데 건강이 악화된 남지가 정사에 적극 참여할 수 없자 조정은 황보 인과 김종서가 좌지 우지하는 상황이 되었고, 정분이 우의정이 된 다음에도 계속 두 사람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단종실록에는 이들 대신이 안평대군 등 종친뿐 아니라 혜빈양씨, 환관 등과 모의하여 궁중에까지 세력을 펴는 한편 황표정사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요직에 배치하여 붕당을 조성하고 끝내는 종실을 뒤엎고 수양대군에게 위협을 가한 것이 계유정난의 원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단종실록이 세조때에 편찬된 점을 고려할 때 이 기록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계유정난은 수양과 그 주변 무리들이 왕권을 탐한 나머지 저지른 비윤리적인 역모라고 보는 것이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단종복위사건(1455년) : 1455년 수양대군이 금성대군을 비롯한 종친들과 신하들을 귀양 보내고 왕으로 등극하자, 세종과 문종에게 특별한 신임을 받았던 집현전 학자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의 문관들은 유응부, 성승 등의 무관들과 모의하여 상왕으로 물러앉은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은 책명사인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오겠다는 통보가 오자 유응부가 왕을 보호하는 별운검에 임명되면서 구체화 되었다. 당시 세조는 책명사를 맞이하기 위해 상왕 단종과 함께 창덕궁으로 가게 되어 있는데, 바로 이 순간 유응부가 세조를 살해한다는 계획 이었다. 하지만 한명회가 창덕궁 연회장이 너무 협소하여 당일에 별운검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세조가 이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암살계획은 뒤로 미뤄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사실을 알려 단종복위에 가담한 사람은 모두 붙잡힌다. 김질이 고발할 때 성삼문에게 들은 말이라 했고 성삼문은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과 같이 모이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더 추궁하자 유응부와 박정도 등도 이 계획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등과 이에 연루된 17인이 투옥되었다.
집현전학자 출신의 단종복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폐되었는데, 또 한번의 단종복위 사건이 금성대군에 의해 일어난다. 하지만 거사 직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해 반역죄로 처형당하고 만다. 단종은 노산군으로 불리우다가 1698년 숙종 24년에 복위되었다.
사육신 :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 중종 때 사림파들이 충절을 기리기 위해 남효은이 지은 육신전에 사육신이라는 말 을 처음 사용했다한다.
참고적으로 사육신 묘에 모셔져 있는 사육신은 7명입니다.
사육신에 대한 논란은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로 알려져 있으나 유응부 대신에 단종복 위운동 당시 공조판서로 있던 김문기를 사육신으로 하여야 한다는 김녕김씨의 주장으로 기계유씨와 사육신을 놓고 분쟁하기도 하였기에 누굴 빼고 누굴 넣을 수 없어 김문기를 더 모시게 되었습니다.
사육신의 진실
서울특별시가 사육신 묘역 정화사업을 전개하면서 사육신 문제에 대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 문의해 옴에 따라 우리 위원회는 1977년 9월 22일 위원회의를 개최하고 세조실록 등 자료를 검토한 후, 김문기가 병자정난(단종복위 모의사건)의 주모자로 관련되어있는 사실을 확인, 회신하였습니다. 1977년 10월 24일자로 서울 특별시장으로부터 김문기의 가묘를 사육신 묘역에 봉안하는 문제에 대하여 우리 위원회의 의견을 물어왔는데, 이에 대해 동년 12월 29일자로 묘역처리에 관한 문제는 우리위원회가 관여할 사항이 아님을 회신하였습니다.
그 후 세간에서 사육신의 관한 논란이 있었고, 백촌 김문기선생 충효사상연구소 등으로부터, 사육신의 구성에 관한 질의가 있었으므로, 1982년 11월 11일 위원회의를 열어, 1977년 12월 29일자 회보 내용을 검토한 후, 김문기 선생을 현창顯彰 하되, 종래의 사육신 구성「성상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에 대하여는 변경한 바 없음을 확인한다고 회보하였습니다. - 국사편찬위원회.
생육신 :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은. 세조 때 한평생 벼슬을 않고 단종을 위해 절의를 지켰다. 이 중 남효은은 사건 당시 불과 두 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성장하여 세조의 부도덕한 찬탈 행위를 비난함으로써 생육신의 한 사람이 되었다.
제7대왕 : 세조(1417년-1455년. 재위:1455년-1468년. 집권 13년 9개월. 52세.)
수양대군의 정국 전복과 왕위찬탈
단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정국의 구도는 왕족파와 고명대신파로 나뉘었다.
왕족 세력 속에는 수양대군을 견제하는 안평대군이 재상정치를 목적으로 하는 있던 대신들 속에는 김종서와 황보인의 권력독점을 비판하던 집현전 학사 출신들이 나름대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단종은 너무 어린 관계로 왕권이 유명무실해지자,김종서와 황보인 등 고명대신들은 왕족인 안평대군을 내세워 수양대군의 세력팽창을 견제했다.
한편 수양은 1452년 집현전 교리 권람을 막하로 끌어들이고, 이후 한명회, 홍윤성 등을 심복으로 삼고 본격적으로 힘을 확대했다. 수양은 1452년 9월 명나라가 단종의 즉위를 인정한다는 고명을 보내오자 조정에서는 사은사를 명에 보내기로 했는데, 수양은 가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일이 종친의 의무임을 내세우면서 자신이 가야 한다고 우겼다. 그 후 명에서 돌아온 1453년 4월부터 수양의 거사 계획은 급진전 되고, 수하에 신숙주를 끌어들이는 한편, 김종서를 철퇴로 죽인 홍달손, 양정, 등 당대의 내노라하는 무사들을 수하에 두고 본격적으로 무력을 양성한다. 1453년 10월 10일 밤 이미 살생부에 따라 정적들을 모두 살해하고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들 신하들을 죽인 명분은 김종서가 황보 인,정분 등과 부동하여 장차 안평대군을 추대하려는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었다.
계유정난에 성공한 수양은 스스로 영의정부사, 영집현전, 내외전, 경연, 춘추,서운관사, 겸판이병조, 내외병마도통사 등 여러 중직을 겸하여 정권을 독차지하고 거사에 직, 간접적으로 가담한 정인지, 권람, 한명회, 양정등 자신을 포함한 43명을 정난공신에 책봉했다.
계유정란이 벌어졌을 때 집현전 학사출신인 성삼문, 정인지, 최항, 신숙주, 하위지 등은 중립을 지켰거나 수양대군에 동조했다. 이들은 재상 중심 체제를 주장하고 있었으나, 의정부의 핵심인 김종서, 황보인 등의 세력이 지나치게 확대되고 있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삼문, 하위지 등은 수양이 왕위를 찬탈한 후 단종복위를 기도하게 되고, 또한 당대 최고의 문인이자 학자인 김시습을 비롯 원호, 이맹전, 등은 수양의 왕위 찬탈 소식을 접하자 스스로 관직을 내놓고 다시는 관직에 나오지 않는 등 수양의 왕위 찬탈에 대한 유생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신숙주 - 예조판서(외교통)
한명회 - 병조판서(군사통)이들은 동시에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에도 봉직함
조석문 - 호조판서(재무통)
세조의 강권정치와 문치의 후퇴
세조는 즉위한 뒤 단종을 상왕에 앉혔다. 하지만 이듬해 좌부승지 성삼문 등 이른바 사육신으로 불리는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이 단종 복위 사건을 계획한 것이 발각되자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해 영월에 유폐시키고 1457년 금성대군이 다시 한 번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그를 사사시키고 단종도 관원을시켜 죽였다.
세조는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한 뒤 왕권강화 정책에 착수 했다. 우선 일종의 내각제인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고 전제 왕권제에 가까운 육조 직계제를 단행했고 집현전을 폐지시키고 정치 문제를 토론하고 대화하는 경연을 없앴으며, 그곳에 설치된 서적들을 모두 예문관으로 옮겨버렸다. 이 때문에 국정을 건의하고 규제하던 기관인 대간의 기능이 약화되고, 왕명을 출납하던 비서실인 승정원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이 시기의 승정원은 육조 기관의 사무 이외에 국가의 모든 중대 사무의 출납도 함께 관장하게 되었다. 이 밖의 왕권 강화책으로 백성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태종조에 시ㄹ시했던 호패법을 다시 복원했으며 동국통감을 편찬해 전대의 역사를 조선왕조의 견지에서 재조명하고 국조보감을 편수해 태조부터 문종에 이르는 4대의 치법과 정모를 편집하여 후왕의 통치 법칙으로 삼았다. 이런 일련의 왕권강화책을 통해 안정기에 접어들자 세조는 왕도 정치의 기준이 될 법제 마련에 박차를 가했다. 최항으로 하여금 경제육전을 정비하게 했으며, 왕조 일대의 총체적법전인 경국대전의 찬술을 시작했다.1460년에는 호전을 복구했으며, 1461년에는 형량을 규정한 형전을 개편, 완성했다.
세조는 역모와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군정 정비에도 각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462년에는 각 고을에 명하여 병기를 제조하게 했으며, 이듬해에는 모든 읍과 병영의 둔전을 파악하고, 모든 도에 군적사를파견하여 군정 누락을 조사하게 하였다.
또한 종래의 현직과 휴직 또는 정직관원에게 나눠 주던 과전을 현직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를 실시해 국비를 줄였으며, 지방 관리들의 모반을 방지하기 위해 지방의 병마절도사는 그 지방 출신을 억제하고중앙의 문신으로 대체하도록 했다. 이 같은 중앙 문신위주의 정책은 지방호족의 불만을 자아내 급기야 이시애의 난 같은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함길도 길주에서 일어난 이 반란으로 한때 조선은 전운에휩싸이기도 했으나, 세조는 이 난을 무사히 평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다져나갔다.
세조는 또한 민간에 만연해 있던 공물을 대납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했으며, 누에 농업을 위해 잠서를 훈민정음으로 해석하고 백성들의 윤리 교과서인 오륜록을 찬수해 윤리 기강을 바로 잡았다.
명,왜 등의 외국과는 유화 정책을 통해 변방의 안정을 꾀했으며 문화 사업도 활발히 벌여 역학계몽, 주역구결, 대명률강해, 금강경언해,대장경 등을 인쇄 간행했고, 태조부터 문종에 이르는 왕들이 지은 시들을 결집한 어제시문을 편집 발간했다.
이처럼 세조는 관제개편과 관리들의 기강확립을 통해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민생 안정책과 유화 적인 외교활동을 통해 민간 생활의 편리를 꾀했으며 법전 편찬과 문화사업으로 사회를 일신시켰다. 그러나 정치운영 에서는 문치가 아닌 강권으로 인재의 등용에서도 실력중심이 아닌 측근 중심의 인사로 일관했기 때문에 이로 인한 병폐가 심각했다.
세조는 대간과 의정부 기능을 완전히 축소하고 승정원을 중심으로 국사를 운영했는데, 이승정원과 육조를 모두 그의 심복들인 정난공신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외교통인 신숙주는 예조판서, 군사통인 한명회는 병조판서, 재무통인 조석문은 호조판서를 했는데, 이들은 동시에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에도 봉직하고 있었다. 또 이들 공신들은 현직에서 물러나도 부원군 자격으로 조정의 정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세조는 불교를 융성시켜 궐내에 사찰을 두었고 승려를 궁으로 불러 들이기도 했다. 그의 불교 융성책은 유교적 입지가 약한 그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측면도 있다.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등 패륜적인 행동이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조의 친불 정책은 유교 이념에 투철한 성리학자들을 견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파란 만장한 삶을 산 세조는 1468년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정희왕후 윤씨를 비롯 2명의 부인에게서 4남 1녀를 얻었으며 능은 남양주 진접읍에 있는 광릉이다.
그가 묻힌 광릉은 세조가 석실의 유해 무익함을 강조하면서 석실과 병석을 쓰지 말라고 한 유명에 따라 병석을 없애고 석실은 회격으로 바꾸어 꾸몄으며 십이지상을 난간동자석주에 옮겨 새겼다.
원상제 : 세조가 말년에 와서 체력의 한계를 느껴 고안한 것인데 왕이 지명한 삼 중신인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이 승정원에 상시 출근해 왕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결정하는 일종의 대리 서무제였다. 세조가 세 중신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것은 이미 악화된 자신의 건강 때문이었다. 그는 원상제를 도입한 해인 1468년 9월에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세자 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그 다음날 죽었는데, 이는 세조가 왕권의 안정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는지 알게 해주는 부분이다.
정희왕후 윤씨 1418-1483 : 판중추부사 윤번의 딸로 본관은 파평이다.
그녀는 계유정난 당시 정보 누설로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그에게 용병을 결행하게 할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였다. 예종이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 하였으며, 예종이 1년 2개월 만에 죽자 요절한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 을산 군을(성종) 그 날로 즉위시켜 섭정을 하기도 했다.
예종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인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그녀는 왕위를 넘겨주지 않았으며, 의경세자의 큰아들인 월산대군이 있었으나, 둘째인 자을산군이 당시 최고 권력자인 한명회의 장인 인지라 정희왕후는 한명회와 결탁하여 결국 둘째인 자을산군에게 왕위를 넘겼다.
의경세자 1438-1457 : 세조의 맏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는 1455년 도원군에 봉해졌으며, 1455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한확의 딸인 소혜왕후 한씨를 아내로 맞아 1454년 월산대군을 낳고 1457년 성종을 낳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해서에 능했던 것으로 전해 지고 있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잔병이 잦았으며 그 때문에 2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세조의 가족들은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많이 시달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의경세자도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렸으며, 그 때문에 그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 21명의 승려가 경회루에서 공작재를 베풀기도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쾌유되지 못하고 병세가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이 때문에 세조는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파내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세조의 무단정치를 수행한 사람들
세조 때 정난공신 세력은 권람과 한명회를 주축으로 하는 세조의 심복세력과 정인지, 신숙주, 최항을 주축으로 하는 집현전 학사 세력으로 나눠질 수 잇다. 이 두 세력의 공통점은 김종서, 황보인 등의 고명대신들로부터 배척을 받았거나, 또는 이들의 정권 독점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심복세력들은 수양을 왕으로 옹립하여 정권을 잡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학사 세력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들 학사 세력도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동조했으며, 그 대가로 세조 시대를 이끄는 주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수양의 좌장 권람 1416-1465
세조의 심복 세력 중 수양대군에게 가장 먼저 접근한 인물은 권람이었다.
그는 한명회와 동문수학하던 사이로 단종 등극 후 김종서 등이 권력을 독점하는데 불만을 품고 집현전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수양대군을 찾아가 거사를 도모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이 넓었으며 뜻이 커 책 상자를 말에 싣고 명산고적을 찾아다니며 학문을 쌓았고, 이때 한명회를 만나 평생의 벗으로 삼는다. 그는 한명회와 '남자로 태어나 변방에서 무공을 세우지 못할 바에는 만 권의 책을 읽어 불후의 이름을 남기자'는 약속을 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 소개했다.
1450년 35세라는 늦은 나이로 향시와 회시에서 장원 급제했다. 사헌부감찰이 되었고 이듬해 집현전 교리로써 수양대군과 함께 역대병요의 음주를 편찬하는데 동참하여 그와 가까워진다. 단종이 즉위하자, 조정의 권력은 김종서, 황보인 등이 독점하게 되었다. 또한 안평대군이 그들 대신들과 결탁하여 세력을 키우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수양대군이 이에 불안을 느끼며 동지를 찾고 있을 때 권람은 한명회의 부탁을 받고 수양대군에 접근하여 집권거사를 모의한다. 계유정란에 성공하자 정란공신 1등에 책록된 그는 집현전 교리에서 일약 승정원 동부승지에 올랐으며, 이듬해 2월에는 부승지,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다시 1년 뒤에 이조판서에 올라 집현전대재학, 지경연춘추관사를 겸하였다.1458년 신숙주와 함께 국조보감을 편찬하고 그 해 12월에 의정부우찬성, 이듬해 좌찬성과 우의정을 거쳐 1462년에는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처럼 성장을 거듭하던 그는 1463년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부원군으로 진봉되었으며, 이듬해부터 신병으로 고생하다가 1465년 5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는 문장에 능했고 호탕한 성품에 활 쏘기 등 무예에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청년시절에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전국을 돌아 다닌 것은 아버지 권제가 첩에 혹하여 어머니를 내쫓 은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으며, 그러다가 한명회를 만나 권력을 꿈꾸게 되었으며, 마침내 수양과 함께 정난을 일으켜 그의 좌장으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게 된 것이다.
수양의 장량 한명회 1415-1487년. 수양의 최고 책사임. 계유정난 1등공신.
조선개국 당시 명 나라에 파견돼 "조선"이라는 국호를 확정 짓고 돌아온 한상질의 손자이며 한기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부모를 여윈 탓에 소년시절을 불우하게 보내야 했고, 그 때문에 과거시험에 번번이 실패해 38세에 겨우 음문으로 경덕궁직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모사에 능하고, 책략에 뛰어난 과단성있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과거로는 도저히 관직에 나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친구 권람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찾아가 거사를 논의케 했고, 다시 권람에 의해 천거 되어 수양의 책사로써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그는 계유정란 때 살생부를 작성하여 조정 대신들의 생과 사를 갈라 놓기도 했다.
정난 성공 후 그는 1등 공신에 올랐으며,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에 제수되었고, 1456년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사건을 좌절시킨 공으로 좌승지를 거쳐 승정원의 수장인 도승지에 올랐다.
이후 이조판서, 병조판서, 4도제찰사를 지냈다. 이렇게 그는 당시 역할이 강화된 승정원과 육조, 변방 등에서 왕명출납권, 인사권, 병권 및 감찰권 등을 한 손에 거뭐쥔 뒤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에 올랐다. 일개 궁 직이었던 그가 불과 13년만에 52세의 나이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정난에 가담했던 인물들과 친인척관계를 맺음으로서 권력의 기반을 더욱 탄탄하게 다져 나갔다. 세조와 사돈을 맺어 딸을 예종비로 만들었고 둘째 딸을 성종비로 만들어 2대에 걸쳐 왕후를 내게 했다. 신숙주와도 인척관계를 맺었으며, 자신의 친우인 권람과도 사돈관계를 맺는다.
1466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이시애의 계략에 말려 신숙주와 함께 하옥되는 지경에 처한다.
세조는 즉위 후 줄곧 왕위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고 이시애의 보고문만 믿고 가장 믿음직스러운 두 신하는 신문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결국 혐의가 없음이 밝혀져 석방된다.
1468년 세조가 죽자 한명회는 세조의 유지에 따라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으로써 정사의 서무를 결제하였다. 예종 1년에 다시 영의정에 복귀하였으며,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이후 좌리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노년에도 부원군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하였으며, 대단한 권세를 누리다가 1487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한명회는 노년에 권좌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갈매기와 벗하며 지내고 싶다 하여 정자를 짓고 여기에 자신의 호를 붙여 압구정이라 불렀다. 그가 죽은 후 연산군 10년에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이때 그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비 사건에 관여했다 하여 부관참시 당했으나 중종 때에 신원되었다.
세조의 위징 신숙주 1417-1475년
신숙주는 세조와 동갑내기로 22살 되던 1438년 사마양시, 생원, 진사시 등에 합격했으며, 이듬에 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농시직장이 되었다. 이후 그는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정리작업에 참여하다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도움을 얻기 위해 성삼문과 함께 13차례나 요동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던 황찬이 그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할 정도로 대단히 총명한 인물이었다.1451년 명나라 사신 예겸 등이 조선에 당도하자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짓기에 나서 東方巨擘이라는 찬사를 얻기도했다. 신숙주는 1452년 수양이 사은사를 자청하자 이때 서장관으로 그를 수행했다.
1453년 신숙주는 승정원에서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쳤지만 김종서 등의 권신들의 경계를 받아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10월에 외직에 나가 있었다. 이런 현실로 보아 신숙주는 수양의 거사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계유정난이 성공으로 끝나자 비서실장격인 도승지에 앉았다.
1455년 수양이 즉위한 뒤에 그는 예문관대제학이 되었고, 주문사로 명에 가서 새 왕의 고명을 청하고 인준을 받아 옴으로써 세조는 명이 인정하는 공식적인 조선 17대 왕이 된다. 이후 그는 병판, 좌찬성, 우의정, 좌의정을 거처 마침내 46세에 영의정에 올랐으며 특히 외교와 국방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염려하여 1464년에 영의정 부사직을 사직한다. 하지만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세조의 유명에 따라 한명회와 함께 원상으로 서무를 결제하는데 참여하고, 이듬해 예종이 죽자 세조의 비 정희왕후에게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자을산군을 왕으로 추천해 결국 그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는데 성공한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그는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때 노병을 이유로 여러 번 사직하였으나 성종의 윤허를 얻지 못했으며, 이후 정치적, 학문적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정계에 남아있다가 1475년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에 대한 당대의 평은 대의를 따르는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으나, 후대에는 사육신, 생육신 등을 좇는 도학적인 분위기가 형성돼 기회에 능한 변절자 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조에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그는 국조보감을 편찬했고 국가 질서의 기본을 적은 국조오례의를 교정, 간행했으며, 사서오경의 구결을 새롭게 만들었다. 또한 훈민정음 확산을 위한 사업에도 참여하여 수많은 고전과 불경의 언해본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특히 외교와 국방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당시 이 분야에 관련된 대부분의 저술에 그의 손이 미치지 않는 것이 없었을 정도였다. 또한 그는 서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보여 주는 몽유도원도에 대한 찬문과 해서체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화명사 예금 시거 등의 작품을 남겼다.
제8대왕 : 예종 1450-1469년. 재위:1468.9윌-1469.11월. 집권 1년2개월. 21세 사망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1457년 형 의경세자가 횡사하자 여덟 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468년 9월 세조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수강궁에서 즉위하였다. 이때 나이 19세였다. 예종은 즉위했으나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데다가 건강 마져 좋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섭정과 원상제도라는 두 가지 형태의 지원을 받으며 왕권을 행사해야 했다. 섭정은 모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조선왕조에서 행한 최초의 수렴청정이었다. 또한 왕의 업무 결재 능력의 미숙함을 보조하기 위해 원상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1468년 유자광의 계략으로 남이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남이를 비롯하여 강순, 조경치, 변영수, 문효량, 고복로 등을 처형시켰으며, 이듬해에는 삼포에서 왜와의 개별무역을 금지하였다. 또한 각도에 있는 둔전을 일반 농민이 경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9월에 최항 등이 경국대전을 찬진 했으나 반포하지 못하고 2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예종의 능호는 창릉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시 서오능 묘역에 있다.
원상제도 : 세조가 죽기 전에 예종의 원만한 정사 운영을 위해 마련한 것으로 신하들에 의한 섭정 제도였다. 왕이 지명한 원로 중신들이 승정원에 항시 출근해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서무를 의결하고 왕은 형식적인 결제만 하는 제도였다.세조가 원상으로 지목한 세 중신은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등 측근 세력들이었다.
장순왕후 한씨 1445-1461 :예종의 정비이며 한명회의 큰 딸임. 1460년에 세자빈에 책봉됐으나,이듬해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1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친동생이 성종의 비 공혜왕후이다.
제안대군 1466-1525년 : 예종의 둘째 아들이며 안순황후 한씨 소생이다.
예종이 죽자 그의 나이는 4살이었고 왕위계승의 첫 번째 후보로 올랐으나,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의 반대로 세자에 책봉되지 못했다. 1498년 안순왕후가 죽은 후로 홀로 거처하였으며 노래를 즐기고 사죽관현 연주에 뛰어났다. 연산군이 네 차례나 음률을 잘아는 여자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그에게 내렸지만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패관잡기」에서는 ‘그는 성품이 어리석었다’고 기록하는 한편 그것은 몸을 보전 하기 위해 어리석음을 가장한 것이라고 적고있다. 왕위 계승 전에 밀려난 사람은 언제든지 죽음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는데, 이를 모면하기 위해 고의로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예종시대 최대의 옥사 남이의 역모 사건
예종은 재위 14개월 동안 대대적인 숙정 작업이 있었는데, 한명회, 신숙주 등의 원상세력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등장한 신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남이, 강순의 역모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으로 약 30명의 무인 관료가 죽고 그 가솔들이 노비로 전락했다. 이 사건의 주모자로 알려진 남이는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의 아들로 무과에 등용된 인물이다. 그는 세조시대 최고의 위기를 불러온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이어서 건주야인을 토벌한 전공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임하고 병권의 수장인 병조판서에 올랐다.
하지만 1468년 세조가 죽자 한명회, 신숙주 등의 노골적인 견제를 받기 시작했고 강희맹, 한계희 등의 훈구 대신들의 입을 통해 남이가 병조판서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하자 에종은 그를 병조판서에서 해임하고 겸사복장직에 임명했다. 예종은 원래 남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남이는 무예가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 할뿐 아니라 세조의 사랑을 독차지 했으나, 예종은 유약하고 정사 처리에도 능하지 않았으며 세조의 신뢰도 두텁지 않았다. 때문에 예종은 당숙뻘이나 되는 남이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마침내 훈구 대신들이 그를 비판하고 나오자 즉시 병조판서에서 해임시켜버렸던 것이다.
남이가 병조판서에서 겸사복장직으로 물러날 때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남이는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몰아 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징조"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당시 병조참지로 있던 유자광은 이 말을 엿듣고 예종에게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고 고해 그를 역신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 때 자신ㄴ과 함께 공을 세운 남이가 세조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것을 시기하고 있다가 마침 남이가 병조에서 밀려나자 그를 완전히 제거해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유자광의 모함으로 졸지에 역모자로 전락한 남이는 즉시 의금부로 잡혀가 문초를 받았다. 이때 증인으로 나온 유자광은 남이가 혜성의 출현은 신왕조가 나타날 징조로써 이때를 이용하여 왕이 창덕궁을 옮기는 시간을 기다려 거사 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진술하고, 또 남이의 측근인 순장 민서도 남이의 집에서 북방 야인들에 대한 방어 계획을 논의할 때 '요즘같은 천변은 반드시 간신이 일어날 징조이니 자신이 먼저 변고 당할까 봐 두렵다'고 말하며 그 간신은 한명회라 했다고 덧붙여 진술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남이 측근들에 대한 문초는 강해질 수 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남이와 함께 겸사복장으로 있던 문효량이 역모를 시인했다. 이 사건에 관련된 자는 남이를 위시하여 영의정 강순, 조경치, 변영수,변자의, 문효량, 고복로, 오치권, 등으로 모두 처형됐다.
남이의 기질과 경력으로 볼 때 역모사건이 완전히 조작된 것이 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세조의 총애를 받다가 예종이 즉위하고 병판에서 밀려나자 울분이 컸을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부 야사에서 남이를 비극적 영웅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은 무오사화, 갑자사화의 책임이 유자광에게 있다고 보는 시각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권선징악적인 가치관이 강한 조선 사학도들은 유자광을 참사를 획책하는 극악무도한 간신배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남이의 역모사건은 단지 간신배 유자광의 날조 극으로 믿고 싶었던 것이었다. 남이는 순조 때 그의 후손 우의정 남공철으 상소에 의해 신원되었다. 남이와 관련된 설화들이 많이 있는데 남이가 귀신을 내쫓음으로서 다 죽어가던 낭자가 살아남았다는 등 대개는 그의 신통력에 대한 이야기다. 이 때문에 민간과 무속에서는 남이 장군 신을 믿는 신앙이 형성돼 지금도 전승되고다.
제9대왕 :성종 1457-1494년. 재위 : 1469-1494년 12월. 집권25년 1개월 38세까지 살았다.
예종이 죽자 왕위계승은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으로(당시4세) 이어져야 하나, 정희왕후와 한명회 등이 결탁하여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을 예종이 죽는 날 왕에 앉힌다. 첫째인 월산군이 당시 16세였으나, 둘째인 13세의 자을산군으로 왕통이 이어진다. 이는 자을산군의 장인이 한명회였기에 정희왕후와 서로 결탁했다. 당시 한명회는 최대 권력가였다.
예종이 병약한 몸으로 왕위를 오래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면서부터 정희왕후는 왕권 찬탈을 우려하고 있었다. 왕실세력의 중심이었던 구성군은 세종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아들로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래서 세조는 그를 매우 총애하였으며, 이시애의 난이 발생하자 사도병마도총사로
임명했다. 구성군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와 오위도총부 총관에 임면되었다가 이듬해 영의정으로 특서되었다. 이때 구성군의 나이 불과 28세였다.그러나 막상 예종이 죽자 그는 위협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정희왕후와 원로대신들은 왕위찬탈을 우려했고 대신, 대간들은 구성군을 집요하게 탄핵하기 시작했고, 1470년 정희왕후는 그에게 유배령을 내리게 되었다. 이 사건 후 종친들의 관료 등용은 법으로 금지되었으며 경국대전 완성이후 이 법은 정착되었다.
성종은 태어 난지 2달만에 아버지가 죽자 세조의 손에 의해 궁중에서 키워졌는데, 천품이 뛰어나고 도량이 넓었으며 射藝와 서화에도 능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어느 뇌우가 몰아치던 날 옆에 있던 환관이 벼락을 맞아 죽어 주위 사람들이 모두 혼비백산 했는데도 그는 얼굴빛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조가 이를 보고 태조를 닳았다고 하면서 기상과 학식이 뛰어 날 것임을 예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3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성종은 성년의 나이인 20살 까지 7년 동안 할머니인 정희왕후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정희왕후에 의한 7년 동안의 섭정기에 있었던 주요사건을 살펴보면 호패법을 폐지하고 경국대전의 교정작업을 완료했으며 숭유억불정책을 강화하여 화장풍속을 없애고 승려들의 도성 출입을 금하였으며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가 비구니가 되는것을 금지했다. 외촌6촌 이내에는 결혼을 금했다. 또 각도에 잠실을 하나씩 설치하여 농잠업을 융성시켰으며 영안, 평안, 황해도에 대대적인 목화밭을 조성하고, 경상, 전라도에 뽕나무를 재배케하여 의류업의 발달을 촉진시키기로 했다.
1476년 수렴청정이 끝나자 조정의 서무결재에 원로 대신들이 참여하던 원상제도를 폐지하여 왕명출납과 서무결재권을 되찾았으며, 김종직 등 젊은 사림 출신 문신들과 가까이 하면서 권신들을 견제했다.
1478년에는 참판이하의 모든 문무신을 교차시켜 권력의 집중현상을 막았으며, 임사홍, 유자광 등 공신세력들을 유배시켜 사림출신 신진세력들의 진로를 열어 주었다.
성종의 세력 균형 정책은 1480년대로 접어들면서 정몽주와 길재의 후손에게 녹을 주는 한편 그들의 학맥을 잇는 사림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여 훈구세력을 철저히 견제하였다. 숭유억불 정책실시하고, 변방을 위협 하던 야인 세력들을 완전히 소탕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한편 성종은 성리학에 심취하여 도학적인 조예가 깊었으며, 경연을 통하여 학자들과 자주 토론하고 학문과 교육을 장려했다.
성종은 1479년 좌의정 윤필상을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건주야인들의 본거지를 정벌하였고, 1491년 함경도 관찰사 허종을 도원수로 삼아 두만강을 건너 우디거의 모든 부락을 정벌하였다. 이 결과 조선 초부터 끊임없이 변방을 위협하던 야인 세력들을 완전히 소탕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이로써 성종은 태조 이후 닦아온 조선왕조의 전반적 체제를 완성시켰으며,조선 백성들은 개국이래 가장 태평성대 한 세월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태평성대는 사회의 한쪽에 퇴폐 풍조를 낳기도 했다. 성종은 후기에 들어 유흥에 빠져 들었고 이것이 확산되어 사회전반에 유흥을 즐기는 풍조가 만연해가고 있었다. 성종은 궁을 빠져나가 규방을 출입 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왕비 윤씨가 그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사건이 발생해 결국 폐비 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이 페비 윤씨 사건은 결국 연산군대에 이르러 갑자사화를 일으킨다.
야사에 등장하는 어우동에 관한 이야기도 이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성종은 1494년 3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으며, 12명의 부인에게서 16남 12녀의 자녀를 얻었다.
소혜왕후 한씨 - 인수대비 1437-1504년. - 의경세자의 비. 월산대군과 성종의 어머니로서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경전에 조예가 깊어 불경을 언해하기도 했으며, 부녀자의 도리를 기록한 내훈을 간행하기도 했다.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성종의 계비 윤씨가 성종의 규방 출입에 질투하여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자 그녀를 폐비시켰다.
연산군이 폐비사건으로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하려 하자, 이를 꾸짖으며 만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병상에 있던 인수대비의 꾸지람을 참지 못한 연산군은 머리로 그녀를 받았으며, 그 며칠 뒤에 68세로 생을 마쳤다. 능호는 경릉으로 고양시 서오능에 의경세자와 함께 합장되었다.
공혜왕후 한씨 1456-1474년. 한명회의 둘째 딸이다.
1467년 12세의나이로 한살 어린 자산군과 가례를 올렸으며 자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1474년 19세의 나이로 소생없이 죽자 공혜왕후에 추증되었다.
폐비윤씨 ? -1482년 -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에 봉해졌고 성종의 총애를 받다 가 1474년 공혜왕후 한씨가 죽자 왕비로 책봉 되었다. 왕비로 책봉되던 해에 세자 융을 낳았는데, 투기가 심해 성종을 난처하게 하는 일이 잦았다. 1477년 극약인 비상을 숨겨 두었다가 이 일이 발탁되어 왕과 왕 주위의 후궁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빈으로 강등될 뻔했으나, 성종의 선처로 무마되었던 적이 있었다. 1479년에는 왕이 규방출입이 잦고 자신을 멀리한다 하여 왕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게 된다. 이일로 성종과 모후인 인수대비의 격분을 유발하여 폐비가 되고 만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근신하며 지냈다.
1482년 조정에서는 세자의 친모인 그녀의 거취문제가 세로운 정치 현안으로 떠오르자 폐비를 옹호하는 자들은 조정에서 따로 거쳐할 곳을 마련하여 주고 생활비 일체를 관부에서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를 반대하는 측의 태도도 완강했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가 성장함에 따라 이미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성종은 내시와 궁녀들을 시켜 그녀의 동정을 살펴 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나인들과 내시들은 인수대비의 명에 따라 왕에게 폐비 윤씨가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는다고 허위 보고를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대신들에게 윤씨에 대한 문제를 의논하게 하여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그녀를 賜死하였다. 사사한 이후 묘비도 세우지 않다가 성종은 세자의 앞날을 고려해 '윤씨지묘'라는 묘비명을 내렸다. 성종은 자신이 죽은 뒤 100년 까지는 폐비문제에 관해 논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겼다. 연산군은 즉위한지 얼마되지 않아 임사홍의 고자질로 이일을 알게 되었다.
임사홍은 자신의 두 아들이 부마였으나, 사림들의 상소로 두 번이나 유배를 갔다 왔다. 사림파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위해 유자광과 상의 하여 성종의 유명을 어기고 연산군에게 고자질했다. 이 폐비 사건은 연산군의 폭정으로 이어져 급기야 조선 조정에 엄청난 살생극을 일으킨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정현왕후 윤씨- 자순대비1462-1530 - 성종의 세 번째 부인이며 중종의 친모이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가 폐출되자 이듬해 왕비에 책봉 되었다. 1497년 자순대비에 봉해졌으며,
1530년 68세를 일기로 죽었다. 능호는 선릉으로 성종과 함께 강남구 삼성동의 선릉에 있다.
사림파의 등장과 조정의 세력균형
성종시대의 정치세력은 훈구세력과 근왕세력인 이른바 도학정치를 내세운 사림세력으로 형성되어 이들 세력간의 힘의 균형을 통해 왕권의 중심을 굳건히 다져 나갔다.
사림파는 삼사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자신들이 주자학의 정통적 계승자임을 자부하고 있었다.
또한 요순정치를 이상으로 삼는 도학적 실천을 표방하여 군자임을 자처하면서 훈구파를 불의와 타협하여 권세를 잡은 소인배들이라고 멸시하고 배척하였다. 이에 대해 훈구파들은 사림들은 홀로 잘난 체하는 야심배들이라고 지탄하며 그들을 배격하였다. 두 세력은 주의와 사상이 달랐기에 사사건건 대립하였고 이러한 갈등은 날로 심화되어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타협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성종의 사림파 중용책으로 인해 조정은 14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사림파와 훈구파의 세력 균형이 가능해졌다. 한편 중앙으로 진출한 사람파들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 부패로 치닫고 있는 유자광, 이극돈 등의 훈구 척신세력들을 비판하자, 훈구세력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성종의 후원 때문에 훈구세력이 사림세력에 밀리는 현상을 보이기 시작하자 사림세력의 지나친 팽창에 위기를 느낀 훈구세력은 연산군이 등극한 이후 자위책의 일환으로 무오사화를 획책하게 된다.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 1431-1492년 : 밀양 출신으로 1453년 진사가 되고 1459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하여 1462년 에는 승문원 박사가 되었다. 이후 경상도병마평사, 이조좌랑, 함양군수 등을 지냈고, 성종이 성년이 되던 1476년에는 고향인 선산의 부사로 재직중이었다. 성종이 정사를 주관하게 되자 중앙으로 진출하였으며 이때부터 영남사학의 거두로서 또한 성종의 근위세력으로서 성장하게 된다. 성종은 학문을 숭상하여 도학정치를 꿈꾸었으며 김종직은 자신의 그런 정치적 이념을 뒷받침해줄 적임자로 생각했다. 특히 김종직의 문하에는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의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성종은 이들과 힘을 합해 훈구, 척신 세력의 독주를 저지하고자 했다.
1483년 우부승지에 오른 김종직은 좌부승지,이조참판,예문관제학,병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기 시작했다. 그의 제자 김굉필, 유호인, 김일손 등도 등용 되기에 이른다.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김종직은 단종을 폐위,살해하고 즉위한 세조를 비판 하였으며 세조의 불의에 동조 한 신숙주,정인지 등의 공신들을 멸시하였다.
그래서 대간에 머물고 있을 때에는 세조의 부도덕함 을 질책하고 세조 때의 공신들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려 훈구세력을 자극하기도 했다.
「조의제문]..「화술주시」- 이것이 사초에 실려 있어 무오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됨.
조의제문은 중국 진나라 때 항우가 초의 의제를 폐한 것을 세조가 단종을 폐한 것에 비유하여 은근히 단종을 조위한 글이었다.
김종직은 유자광을 멸시하였는데, 함양군수로 부임할 때 유자광의 시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철거하여 태워버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유자광은 김종직에 대해 사적인 원한을 품게 되었고 후일 이극돈과 손을 잡고 무오사화를 도모하게 된다.
이극돈은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세조비 정희왕후喪 중에 근신하지 않고 장흥의 기생과 어울 렸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적은 것과 이극돈이 뇌물을 받은 것을 사초에 기록했다. 이극돈은 이사실을 알고 김일손에게 청을 넣어 삭제해주기를 바랬으나, 김일손은 거절했다.
김종직은 1492년 6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으며 무오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했다.
조의제문
"정축 10월 어느 날에 나는 密城으로부터 京山으로 향하여 踏溪驛에서 자는데, 꿈에 神이 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양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楚나라 회왕懷王 손심孫心인데, 西楚 패왕에게 살해 되어 빈강에 잠겼다.」 하고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생각하기를 「회왕은 南楚 사람이요, 나는 東夷사람으로 지역의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이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역시 천 년이 휠씬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정녕 項羽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드디어 文을 지어 조문한다.
하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四大 五常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라서 풍부하고 이적이라서 인색한 바 아니거늘,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을 손가. 그러기에 나는 이인夷人이요 또 천 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하노라.
옛날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하니, 四海의 물결이 붉어 피가 되었네. 비록 전유, 추애라도 어찌 보전할손가. 그물을 벗어나기에 급급했느니, 당시 六國의 후손들은 숨고 도망가서 겨우 편맹(編氓)가 짝이 되었다오. 항양項梁은 남쪽 나라의 장종將種으로, 어호魚狐를 종 달아서 일을 일으켰네.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에 따름이여! 끊어졌던 웅역熊繹의 제사를 보존하였네. 건부를 쥐고 남면을 함이여! 천하엔 진실로 미씨보다 큰 것이 없도다. 장자를 보내어 관중關中에 들어가게 함이여! 또는 족히 그 인의를 보겠도다.
양흔 낭탐(羊?狼貪)이 관군冠軍을 마음대로 축임이여!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아아,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에 있어, 나는 왕을 위해 더욱 두렵게 여겼네. 반서를 당하여 해석이 됨이여, 과연 하늘의 운수가 정상이 아니었구려. 빈의 산은 우뚝하여 하늘을 솟음이야!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녁에 가깝고. 빈의 물은 밤낮으로 흐름이여! 물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르도다. 천지도 장구한들 한이 어찌 다하리 넋은 지금도 표탕瓢蕩하도다.
내 마음이 금석을 꿰뚫음이여!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네. 자양紫陽의 노필老筆을 따라가자니, 생각이 진돈하여 흠흠欽欽하도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어! 바라건대 영령은 와서 흠항하소서.’ 하였다."
그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했다.’는 조룡은 진 시황秦始皇인데, 김종직이 진 시황을 세조에게 비한 것이요, 그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을 따랐다.’고 한 왕은 초 회왕楚懷王 손심孫心인데, 처음에 항량項梁이 진秦을 치고 손심을 찾아서 의제義帝를 삼았으니, 김종직은 의제를 노산魯山에게 비한 것이다.
그 ‘양흔 낭탐하여 관군冠軍을 함부로 무찔렀다.’고 한 것은, 김종직이 양흔 낭탐으로 세조를 가리키고, 관군을 함부로 무찌른 것으로 세조가 김종서를 베인 데 비한 것이요. 그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 했느냐.’고 한 것은, 김종직이 노산이 왜 세조를 잡아 버리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반서를 입어 해석이 되었다.’는 것은, 김종직이 노산이 세조를 잡아 버리지 못하고, 도리어 세조에게 죽었느냐 하는 것이요.
그 ‘자양紫陽은 노필老筆을 따름이여, 생각이 진돈하여 흠흠하다.’고 한 것은, 김종직이 朱子를 자처하여 그 마음에 부賦를 짓는 것을, 《강목(綱目)》의 필筆에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일손이 그 문文에 찬贊을 붙이기를 ‘이로써 충분忠憤을 부쳤다.’ 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세조 대왕께서 국가가 위의危疑한 즈음을 당하여, 간신이 亂을 꾀해 禍의 기틀이 발작하려는 찰라에 역적 무리들을 베어 없앰으로써 종묘 사직이 위태했다가 다시 편안하여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 공과 업이 높고 커서 덕이 百王의 으뜸이신데, 뜻밖에 김종직이 그 문도들과 聖德을 기롱하고 논평하여 김일손으로 하여금 역사에 무서誣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어찌 일조일석의 연고이겠느냐. 속으로 불신의 마음을 가지고 세 조정을 내리 섬겼으니, 나는 이제 생각할 때 두렵고 떨림을 금치 못한다. 동·서반(東西班) 3품 이상과 대간·홍문관들로 하여금 형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화술주시和述酒時 : 도연명이 남조조의 송나라 무제가 동진의 안제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사실을 비난하여 지은 述酒時에 화답
한 시로 세조를 은근히 비난하고 있는 내용
경국대전 완성의 의미와 형성과정
고려로부터 조선초에 걸쳐 반포된 법전, 교지, 조례, 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이 수차의 개정 끝에 25년만인 1485년 완성되어 반포되었다. 이것은 조선시대 통치의 기본 법전으로 우리 나라에 전해져 오는 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문헌적 가치가 대단히 크다.
동국여지승람
이 책은 1481년 50권으로 편찬되었다. 내용은 1477년에 편찬한 팔도지리지에다 동문선에 수록된 동문국사의 시문을 첨가한 것이다. 이 책의 몇몇 권에는 경도, 한성부, 경기도, 개성부, 충청도, 경상도, 등 각 지방의 군현이 수록되어 있는데, 경도 앞에는 조선 전도인 팔도총도가 실려있으며 각 도 첫머리에는 도별 지도가 삽입되어 있다. 이 지도들은 실측지도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지극히 단순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지도의 정확성 여부를 떠나 지리지에 지도를 첨부한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편집이었다.
동국통감
성종의 명에 따라 서거정 등이 신라초부터 고려말까지의 역사를 편찬한 사서로 총 56권 28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문선
1478년 성종의 명으로 편찬된 우리나라 역대의 시문선집으로 총 130권으로 되어 있는 방대한 문학 총서이다. 동문선 편찬 작업에는 서거정이 중심이되어 노사신, 강희맹, 양성지 등을 포함해 총 23명이 참여하였다. 이 책에는 신라의 김인문, 설총, 최치원 등을 비롯, 고려를 거쳐 당대까지 약 500명에 달하는 작가들의 작품 4302편이 수록되어 있다.
악학궤범
조선시대의 의궤와 악보를 정리하여 성현등이 편찬한 악서이다. 총 9권 3책으로 되어 있으며 내용이 치밀하고 정확하여 조선 초기의 음악 전반을 자세히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책이다. 1493년 성종의 명에 의해 예조판서 성현, 장악원제조 유자광, 등이 편찬하였다. 제 5권에서는 처용가, 동동, 정읍 등을 수록하고 있다. 제 5권에 실린 훈민정음으로 된 동동과 정읍 등은 악장가사에도 없고 오르지 악학궤범에서만 볼 수있는 귀중한 국문학적인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제10대왕 : 연산군 1476-1506년. 재위:1494.12월-1506.9월. 집권11년9개월. 31세 생을 마감.
연산은 자신의 내면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음험한 구석이 있었으며 괴팍하고 변덕스러웠다. 게다가 학문을 싫어하고 학자를 좋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집스럽고 독단적인 성향도 있었다.
성종은 이런 연산을 탐탁치않게 여겼지만, 1483년 그를 세자에 책봉한다. 이에 인수대비는 폐비의 아들 을 세자로 책봉하면 후에 화를 부를 것이라며 반대한다. 하지만 이때는 진성대군도 태어나지 않은 때라 왕비 소생의 왕자는 융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 성종도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그를 세자로 책봉할 수 밖 에 없었다. 이때 세자 융의 나이는 8세였다. 1494년12월 왕위를 이어받은 연산군은 적어도 폭군은 아니었다. 등극 6개월 후에는 전국의 모든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관료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문신의 사가독서를 다시 실시하여 학문의 질을 높이고 조정의 학문 풍토를 새롭게 했다. 하지만 명분과 도의를 중시하는 사림들은 사사건건 간언을 하는가 하면 연산군에게 학문을 강요했다. 원래 학문에 뜻이 없고 학자와 문인들을 경원시 하던 연산군은 그 때문에 사림을 귀짢게여겼다.
이때 때마침 일어난 것이 1498년 무오사화이다.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에 대한 개인적 원한이 극에 달해있던 유자광, 이극돈의 상소로 시작된 이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사림 세력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던 연산군에게 사림세력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가 된 것이다.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통해 자신과 대립했던 사림세력을 축출하는 한편 일부 훈신 세력까지 제거하게 되었고왕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정을 장악한 연산은 매일같이 향연을 베풀고 기생을 궁으로 끌어들였다. 이때 궁중으로 들어온 기생을 흥청이라 했 는데, 여기서 마음껏 떠들고 논다는 뜻인 '흥청거리다' 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같은 사치행각은 결국 국고를 거들 내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백생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강제로 몰수하려 했다. 하지만 조정대신들은 이에 반발하여 왕과 대립하며 연회를 줄이고 국고를 아낄 것을 간청한다.
이때 정권을 장악하려던 임사홍은 폐비윤씨 사건을 연산군 에게 밀고하게 된다. 내막을 자세히 모르던 연산은 임사홍의 밀고로 그 내막을 알게 되자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는 대살생극을 자행하는데 이것이 갑자사화이다. 그는 문신들의 직간이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 과 사간원,홍문관,등을 없애 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하였으며, 기타 모든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여론 과 관련되는 제도들은 남김없이 철폐해버렸다. 또 성균관, 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의 본산인 흥천사를 마굿간으로 바꾸었으며, 민간의 국문투서 사건이 발생하자 훈민정음의 사용을 금지하는 등 광적인 폭정을 일삼았다. 이렇듯 폭정이 계속 이어지자 전국 각지에서 반정을 도모하는 무리가 늘어났으며, 1506년 박원종, 성희안 등이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연산군 폐출이 성공하자 박원종 등은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에 유배시켰는데 두 달 뒤인 1506년 11월 그는 그 곳에서 3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사림파의 개념과 존립의미
한 사학자의 저술에는 조선 전기의 문인, 학자의 유파를 훈구파, 절의파, 사림파, 청담파 등으로 구분했는데, 이 구분에서 사림파는 훈구파와 대비되는 존재로서 그 대상이 둘로 나누어지고 있다.
우선 성종대에는 문장, 경술과 관련하여 영남 일대의 종주격이던 김종직 문하를 가리켰고, 다음으로는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의 밑에서 수업한 중종대의 조광조 일파를 지칭한다.
김종직 문하들이 주로 문예를 중시한 영남학자 들이었다면 조광조 일파는 도학의 비중을 절대시했던 영남, 기호학자들이라는 점이 둘 간의 차이다. 사림은 현직 관리보다는 재야 지식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학자들을 지칭한다. 이들의 학습관은 관학인 사부학당이나 향교보다는 서원이나 서재를 통한 경우가 많았고 사림파는 성리학 중에서도 중국 송대의 정호, 정이 형제와 주희가 체계화한 정주성리학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들은 인재등용에서도 과거제 보다는 천거제를 선호하였다. 중종 때 조광조 등은 현량과를 통해 이를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16세기 사림은 정치적으로 훈척세력과 대립하면서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규합되었다. 그러나 16세기말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척신 정치가 종식되자 사림은 내부적으로 학연과 파벌에 따라 나누어 지게 되는데 이를 흔히 붕당정치라 부른다.
무오사화 -戊午史禍 1498년「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
1498년 실록청이 개설되고 이극돈이 실록작업의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점검 과정에서 김종직이 쓴 [조이제문]과 이극돈 자신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발견했다「화술주시」.
「조의제문」- 項羽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 즉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글을 지었는데, 이것은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단종端宗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글이다.
또한 이극돈이 전라감사로 있던 중 세조비 정희왕후 喪 중에 근신하지 않고 장흥의 기생과 어울 렸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적었고 이 상소 사건으로 이극돈은 김종직을 원수 대하듯 했는데 이때 유자광을 찾아갔고, 유자광은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 윤필상 등의 훈신세력과 모의한 뒤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이 사건으로 김종직은 부관 참시형이 가해졌고 김일손,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능멸했다는 이유로 능지처참 등의 형벌을 내렸고, 강겸은 곤장 100대에 가산을 몰수하고 변경의 관노로 삼았다. 정여창, 이수공, 정희량 등은 불고지죄로 곤장 100대에 3천리 밖으로 귀양보냈고, 김굉필, 강혼 등은 김종직의 문도로써 붕당을 이루어 국정을 비판하고 [조의제문] 의 삽입 을 방조한 죄목으로 곤장을 때려 귀양 보내 관청의 봉수를 짓게 하였다. 이극돈도 修史官으로써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됐다. 이 사건으로 신진사림이 죽거나 유배당 하고 이극돈까지 파면 되었지만, 유자광만은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조정의 대세를 장악했다.
화술주시和述酒時 : 도연명이 남조조의 송나라 무제가 동진의 안제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사실을 비난하여 지은 述酒時에 화답한 시로 세조를 은근히 비난하고 있는 내용.
조선시대 4대사화
1. 무오사화 戊午史禍
2. 갑자사화 甲子士禍
3. 기묘사화 己卯士禍
4. 을사사화 乙巳士禍
갑자사화 甲子士禍 1504년 - 폐비 윤씨사건이 발단이 됨.
무오사화로 언론기관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상황에서 연산군의 국정운영은 방만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사림이 완전히 제거된 마당이라 그에게 학문을 권하는 이도 없었고 간언을 하는 이도 없었다.
조정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연산군은 향락과 패륜 행위를 일삼았고, 매일 궁궐에서는 연회가 벌어졌으며 전국 각지에서 수 백명의 기생이 동원 되었다. 이렇게 사치와 향략이 심해지자 국가 재정이 거덜나기 시작했다.
국고가 빈 것을 안 연산은 이를 메우기 위해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요구하고 노비까지 몰수하려하자 대신들은 왕의 지나친 향락을 자제해 줄것을 간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하들 모두가 연산군에게 반발했던 것은 아니다.
무오사화 이후 조정은 외척 중심의 궁중파와 의정부 및 육조중심의 부중파로 갈라졌다. 따라서 공신전을 소유하고 있던 부중파 관료들은 연산군의 공신전 몰수 의지에 반발하고 있었지만, 궁중파는 일단 왕의 의도에 부합하자는 논리를 펴고 있었다. 이런 대립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으려는 인물이 바로 임사홍이었다. 임사홍은 두 아들을 예종과 성종의 부마로 만든 척신 세력 중의 하나였다. 그는 성종 때 사림파 신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간 적이 있다. 그래서 그는 사림을 싫어했다. 연산군과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해 훈구세력과 잔여 사림세력을 일시에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비 신씨의 오빠 신수근과 손을 잡고 음모를 꾸미던 끝에 연산군의 친모였던 윤씨의 폐비사건을 들추어 낸다.
윤씨의 폐출 경의를 알게 된 연산군은 엄청난 살인극을 자행 한다. 우선 폐출에 간여한 성종의 두 후궁 엄 귀인과 정 귀인을 궁중 뜰에서 직접 참하고 정씨 소출인 안양군, 봉안군을 귀양 보내 사사시켰다. 병중에 있는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부상을 입혀 3일만에 죽게했다. 윤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김굉필 등 10여명이 사형당하고 이미 죽은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남효은 등은 부관참시에 처해졌다. 이 밖에도 김처선 등 많은 사람들이 참혹한 화를 입었으며 이들의 가족자녀에 이르기까지 연좌시켜 죄를 적용했다. 이처럼 벌어진 이 갑자사화의 희생자의 규모뿐 아니라 그 형벌의 잔인함이 무오사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오사화는 신진사림과 훈구세력 간의 정치투쟁 이었지만 갑자사화는 왕을 중심으로 한 궁중세력과 훈구,사림으로 이어지는 부중 세력의 힘의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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