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9. 15:32ㆍ역사
제11대왕 : 중종 1488 -1544년. 재위: 1506 - 1544년11월. 집권 38년2개월. 57세 사망.
연산군의 폐출과 진성대군의 등극.
중종반정:1506년 성희안, 박원종 등이 주축이 돼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 거사에 돌입한 반란군은 먼저 진성대군에게 거사사실을 통보하고 신수근,신수영 형제와 임사홍을 제거 하는데 성공했다.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는 이들의 청을 처음에는 거절 하다가 결국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 교동에 안치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튿날 진성대군이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거사는 완결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중종은 등극한 뒤 가장 먼저 나라 기강을 바로잡고 정치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역점을 두었다. 홍문관 기능을 강화하고 경연을 중시하여 정책 논쟁의 강도를 높였으며 문신의 월과, 춘추시과, 사가독서,전경 등을 엄중히 시행하여 문벌세가들을 견제하려 했다. 중종 즉위 4년 후인 1510년 영의정직에 있던 박원종이 죽어 공신세력의 위세가 많이 위축되었고, 개혁적인 분위기가 사회에 확산되면서 정치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 가고있었다.
중종은 공신 세력을 견제할 방도를 모색하던 끝에 1515년 조광조를 정치 일선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조광조 일파의 개혁정책은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 해서 훈구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더군다나 조광조 일파가 도학적 이념을 내세워 임금에게까지 압박을 가하자 중종 역시 조광조의 급진적 경향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중종의 이런 심중을 헤아린 훈구파의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은 1519년 반정공신 위훈 삭제사건을 계기로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지럽히니, 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계를 올렸다. 중종은 이들 훈신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조광조, 김정, 김식 등 신진사림세력을 숙청 하였는데, 이를 기묘사화라 한다.
이들은 경빈 박씨 등 후궁을 이용해 중종에게 '온나라의 민심이 조광조에게로 돌아갔다고 하고 궁중에 있는 나뭇잎에 走肖爲王이라 쓰고 벌레가 그것을 갉아먹게 한 다음 궁녀를 시켜 왕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주초는 조 趙를 분리한 글자 이므로 조씨가 왕이 되려 한다는 뜻이었다. 비록 미신에 불과했지만 조광조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몹시 불쾌 해했다. 치죄 결과 조광조는 능주에 유배되었다. 그러다 훈구파가 영의정, 좌이정, 우이정 등에 임명되자 곧 사사 되었다. 이 사건은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정치에 위기를 느낀 훈구세력이 지나친 도학적 요구에 염증을 느낀 중종과 모의하고 벌인 일종의 친위 쿠테타적 성격이 짙다. 중종의 정치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는데, 그것은 인재 활용의 미숙함과 뚜렸한 정치 철학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단경왕후 신씨(1487 -1557년) : 익창부원군 신수근의 딸이다. 진성대군이 왕으로 추대되자 왕비에 올랐으나 고모가 연산군의 비이고 아버지가 연산군의 매부라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신씨의 폐위와 관련 해서는 치마바위 이야기가 전해진다. 자식은 無 71세 일기.
장경왕후 윤씨(1491-1515년) :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1515년 세자「인종」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6일만에 25세를 일기로 경복궁 별전에서 죽었다..
문정왕후 윤씨(1501-1565년) : 1517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며,1545년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 에 오르자, 8년 동안 수렴청정 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도 했는데,폐지되었던 승과, 도첩제 등을 다시 실시했고, 승려 보우를 총애하여 병조 판서직에 제수하는 바람에 대신 들의 불만을사기도 했다. 명종은 그녀의 지나친 정권 욕에 불만을 품고, 신진사림 세력들을 등용시켜 외 척 세력을 견제하려 했으나, 번번히 그녀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듯 조선조정을 패권다툼의 장 으로 몰아갔던 그녀는 희대의 악후였다. 그녀는 1남4녀 를 낳았으며 35세에 명종을 낳았다.
조광조 : 그는 29세가 되던 1510년 사미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그 해 성균관에 입학 했다. 1515년 성균관 유생 200명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의 추천으로 조지서사지라는 관직에 임용되고, 그 해 가을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전적,감찰, 예조좌량을 역임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된다. 중종은 그를 정언에 앉혀 언론을 통해 훈구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1517년 그는 그 동안 형성한 세력을 기반으로 중종과 함께 본격적인 개혁을 단행 하기에 이르렀다.
첫째 : 향약의실시.향약은 성리학적 이상사회. 즉 모든 백성을 성리학적 규범으로 교화 시켜 왕도정치의 기반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 현량과의 도입.(인제 천거제도)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사람을 천거하는 제도를 통해 인재를 등용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훈구파의 엄청난 반대가 있었지만 중종의 지원에 힘입어 1519년 전격 실시되었다. 이 곳을 통하여 등장한 인물은 신진사림파가 많았는데, 그들은 조광조 의 추종학자들로 학맥 또는 인맥으로 연결되어 강한 연대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사림은 중종을 압박하며 자신들의 의지대로 밀어붙였고, 결국 중종이 밀리고 말았다. 훈구 대신들의 막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전 공신의 4분의3에 해당하는 76명의 훈작을 삭탈했던것이다. 이에 훈구 세력 은 더 이상 사림파의 급진적인 성향을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중종에게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조직해 조정을 문란케 하고 있다고 탄핵을 한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중종은 훈신들의 탄핵을 받아 들여 대대적인 사림파 숙청을 감행하였다. - 이것이「기묘사화」이다 -1519년 이로써 4년 동안의 조광조의 정치개혁은 막을 내리지만, 그의 도학적 왕도 정치는 후대에 막대한 영향 을 끼쳤다.
기묘사화 己卯士禍 - 1519년(중종 14) 남곤·홍경주 등의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의 신진 사류가 축출된 사건.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고 성균관을 중수하였으며, 두 차례의 사화로 희생된 사람들을 신원하고, 명망 있는 신진 사림파를 등용하였다.
중종의 지우를 얻은 신진 사류는, 성리학에 의거한 이상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먼저 중종에게 철인군주주의 이론을 가르치면서, 군자를 중용하고 소인을 멀리할 것을 역설하였다. 나라의 미풍양속을 기르기 위하여 미신타파와 향약실시를 강행하고, 유익한 서적을 국가에서 간행 ·반포하게 하였으며, 현량과를 설치하여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뜻을 달리하는 문인의 사장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고 오직 도학사상만을 강조하여, 훈구파를 소인으로 지목하여 철저히 배척하며, 현실을 무시하고 급진 정책을 시행하는 등 지나친 이상주의를 펼쳤다. 또 중종반정 공신들을 중용함으로써, 그들 가운데 76명은 뚜렷한 공로 없이 공훈을 남수濫授하였으니 삭제해야 한다는, 위훈삭제僞勳削除사건을 야기시켰다.
신진 사류와의 알력과 반목이 날로 커져가는 가운데 정면 도전을 받은 훈구파는, 홍경주의 딸이 중종의 후궁인 것을 이용하여, 궁중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의 4자를 쓴 뒤, 이것을 벌레가 갉아먹어 글자 모양이 나타나자, 그 잎을 왕에게 보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였다. ‘走 ·肖’ 2자를 합치면 조趙자가 되기 때문에, 주초위왕은 곧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남곤 ·심정 ·홍경주 등 훈구파의 사주도 있었지만, 신진 사류의 급진적 ·배타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낀 중종은 결국 신진사류를 몰아내었다.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가서 사사되고, 김정 ·기준 ·한충 ·김식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 또는 자결하였다. 김구 등 수십명도 역시 유배되고, 이들을 두둔한 김안국 ·김정국 등은 파직되었다.
서경덕(1489-1546년) : 호는 화담. 그는 조광조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에 응시하도록 수석으로 추천 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화담에 서재를 세우고 학문연구와 교육에만 매달렸다.
1531년 어머니의 간청으로 43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 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며, 1544년 김안국 등이 후릉참봉에 추천하였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렀다.
그는 성리학자들 중에 스승이 없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이 시대에 황진이는 화담을 유혹하는데 실패하고 오히려 그의 학문과 고고한 인품에 매료되어 사제관계를 맺기도 한다.
제12대왕 : 인종(1515-1545년. 재위 : 1544년 11월-1545년 7월. 집권 9개월간.31세일기.)
중종과 장경왕후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6세에 세자에 책봉되어 25년간 세자로 있다가 1544년 중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인종의 모후인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6일만에 25세를 일기로 죽었다.그래서 그는 문정왕후 윤씨 손에서 자랐다. 윤씨는 성질이 고약하고 시기심이 많은 여자이기 때문에 전실 부인의 아들인 인종을 무척이나 괴롭혔다. 그는 성품이 조용하고 효심이 깊으며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3세 때부터 글을 읽었고 8살 나이로 성균관에 들어가 매일 세 차례씩 글을 읽었다. 철처한 금욕생할을 추구했고, 일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한다. 이는 그가 도학 사상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인종은 인성왕후 박씨와 귀인 정씨 두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슬하 의 자녀는 없었다. 귀인 정씨는 정철의 큰누이이다. 인종은 30세에 즉위하여 31세에 죽음.
제13대왕 : 명종(1534-1567년.재위 : 1545년7월-1567년6월. 집권 22년.34세일기로 죽음.)
인종이 재위 9개월 만에 병사하자,명종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때문에 8년 동안 모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다.
대윤 -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 일파
소윤 - 문정왕후 동생 윤원형 일파
을사사화 乙巳士禍 - 1545년 윤원형 일파는 윤임일파 등을 제거하기 위해 윤임이 성종의 셋째 아들 계성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린다. 이를 구실로 문정왕후에게 이들의 숙청을 강청하여 윤임,유관,유인숙 등을 사사케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일파인 사림세력들을 유배시켰다.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윤원형 일파는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조정을 완전히 장악 하게 되자 이른바 '외척 시대'가 도래 했고 이때부터 명종은 그들의 횡포에 시달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윤원형은 막상 권력을 독점하자 그 동안 자신에게 불만을 토로하던 친형 윤원로를 유배시켜 사사했다.또 자신의 애첩 정난정과 공모하여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하고 노비출신인 그녀를 정경부인의 자리에 올려 놓았다. 정난정은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부를 축척 하였다. 이 때문에 윤원형의 집에는 뇌물이 폭주하여 한성 내에 집이15채나 됐으며 남의 노예와 전장을 빼앗긴 것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고, 죽고 사는 것이 그의 손에 달렸다는 말이 오갈 지경이었다. 또한 정난정은 봉은사의 승려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 병조판서직에 오르게 하였다.
문정왕후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종이에 적어 보냈다가 그것이 수용되지 않으면 왕을 불러 면상에다 대 고 반말로 욕을 해대는가 하면 심지어는 왕의 종아리를 때리거나 빰 을 때리기도 했다. 왕의 권위가 이 처럼 땅에 떨어지고 조정 대신들은 권력을 독점하며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해 있었기에 사회는 어수 선하고 민심은 병들 수 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년이 계속되고 있었다.
백성의 태반이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고 나라 구석구석 마다 도적 떼가 난립하였다. 이시기에 임꺽정이 나타난다. 이같은 조선 혼란의 근본 원인은 문정왕후에게 있었다.
마침내 1565년 그녀가 죽자 조선은 급속도로 평화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녀가 죽자 승려 보우는 유림들의 탄핵을 받아 병조판서에서 밀려 나고 승직을 박탈당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죽었으며,윤원형 역시의 애첩 정난정과 함께 강음에 유배 되었다가 자살 하였다. 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은 1565년까지 약 20년 동안 왕권을 능가하는 권세를 부리며 온갖 학정을 자행했다. 명종은 문정왕후가 죽은 2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인순왕후 심씨에게서 순회세자를 얻었으나 13세에 죽었다. 때문에 후사를 남기지 못해 중종의 9째 아들 덕흥군의 3째 아들 하성군(선조)이 이어 받았다. 하성군의 즉위로 조선은 후궁에게서 태어난 서얼출신인 방계혈족이 왕위 를 잇는 상황에 처해졌고 이 때문에 왕의 권위는 한층 떨어지게 되었다.
작서의 변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가 세자를 낳고 산후병으로 죽자, 왕의 총애를 받은 경빈 박씨는 자기 소생인 복성군을 세자로 책봉할 야망을 품고 있었다.
때마침 1527년 2월 세자(뒤의 인종) 생일에 쥐를 잡아 사지와 꼬리를 가르고, 입 ·귀 ·눈을 불로 지져서 동궁(東宮)의 북정(北庭) 은행나무에 걸어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나자, 김안로(金安老) 등은 이것을 복성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경빈의 짓이라 하여, 경빈과 복성군의 작호(爵號)를 빼앗아 서인(庶人)이 되게 하였다.
1533년에는 모자(母子)를 모두 사사(賜死)하였다. 1541년에 이 사건을 조작한 자가 김안로의 아들 김희(金禧)라는 것이 밝혀져, 경빈과 복성군은 신원되었다.
인순왕후 심씨(1532-1575년) - 1551년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13세의 나이로 요절 했고 더 이상 후사를 잇지 못했다.
제14대왕 : 선조(1552-1608년. 재위:1567- 1608년. 집권 40년 7개월. 59세.
명종이 후사없이 죽자 그의 부인 인순왕후 심씨는 명종의 유명과 종실의 천거에 의해 중종의 후궁인 창빈안씨의 소생인 덕흥군의 셋째인 하성군을 양자로 받아들이고 수렴 청정했다. 이때 하성군의 나이는 16세였는데 인순왕후 심씨가 수렴청정을 했으나 선조가 정사처리에 능숙하고 친정할 능력이 있다는 판단에 따라 이듬해 17세가 되던 해에 편전을 넘겨주었다. 그는 즉위 초에는 학문에 증진하고 경연에 나가 정치와 경사를 토론하였으며 제자백가서 대부분을 섭렵하였다. 이에 따라 성리학적 왕도정치의 신봉자가 됐으며 훈구,척신세력을 모두 밀어내고 사림의 명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황과 이이를 나라의 스승으로 여기고 극진히 대우했으며 이황이 죽었을 때는 3일 동안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기도 했다.
척신들이 완전히 조정에서 사라지자 정권을 장악한 사림은 분당되는 사태에 직면했고 이후 동인과 서인 으로 분리되어 당파 싸움을 하게 된다.
붕당정치
붕당대립의 직접적인 발단은 1575년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의 반목에서 비롯되었다. 전랑직은 그 직위는 낮으나(정5품) 인사권을 쥐는 직책으로, 판서나 국왕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고,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면 공의에 부쳐서 선출하였으므로 관료들 간의 집단적인 대립의 초점이 되었던 것이다.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은 허엽이 영수로 있었고,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은 박순이 영수가 되어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처음에는 동인이 우세하여 서인을 공격하였으나, 동인은 다시 서인에 대한 강온 양론으로 갈라져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분파되어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서인 ·남인 ·북인의 삼색(三色)이 형성되었다.
남인은 우성전 ·유성룡이 중심이 되었고, 북인은 이발 ·이산해 등이 중심이 되었으나, 임진왜란 후에 남인 유성룡은 화의를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실각되자 북인 남이공이 정권을 잡게 되어 남인은 몰락하였다.
득세한 북인은 다시 선조의 후사문제로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져 대립하다가, 대북파가 옹립하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정권을 장악하고, 소북파를 일소하기 위하여 영창대군을 모함 ·살해하는 한편, 외척인 김제남과 그 일족을 처형하였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이러한 폭정은 오랫동안 대북파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에게 집권할 기회를 주었으니, 곧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이 바로 그것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천하는 서인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 수십 명이 처형되고, 수백 명이 유배되었다. 서인이 집권하는 동시에 남인 이원익이 입상하게 됨으로써 남인이 제2의 세력으로 등장하여 숙종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서인과 남인의 공존을 바탕으로 한 대립이 계속되었다. 즉, 효종이 즉위하자 서인 김자점은 역모로 실각하였으나 같은 서인인 송시열파가 등장하여 서인의 집권은 현종 초까지 계속되다가 현종 즉위 후 효종의 모후 조대비의 복상 문제를 놓고 서인의 주장인 기년설(1주년설)과 남인의 주장인 3년설(2주년설)이 대립하는 이른바 기해복제문제가 발생하였다. 처음에는 서인의 송시열과 남인의 윤휴사이에 벌어진 예학논의에 불과하던 것이 점차 당론으로 전환되면서 양파는 여기에 정치적 운명을 걸었고, 결국 서인의 주장이 채택됨으로써 정권에는 변동이 없었다.
그러다가 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 인선왕후의 상을 당하자 다시 복상문제가 터져 남인은 기년설을 주장하고 서인은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주장하여,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이 때, 남인은 송시열 등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과격파와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로 갈리어 이들을 청남 ·탁남이라 불렀다.
새로 정권을 잡은 남인은 그 전횡이 심하여 집권한 지 몇 년 만에 쫓겨나서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하였고,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이 재등용되었다. 그러나 서인 사이에도 분열이 생겨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으로 갈리었다. 그러던 중 1689년 서인이 물러나고, 송시열이 사사되는 이른바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등용되었다. 그러나 1694년에는 왕에 의하여 남인이 다시 쫓겨나고 서인이 재등용되는 갑술환국이 벌어져, 남인은 재기불능의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후로는 노론 ·소론이 대립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숙종의 후사문제로 인한 신임사화가 일어나 노론의 김창집 ·이건명 등은 대역죄로 몰려 죽게 되고, 노론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당쟁을 몸소 체험한 후 왕위에 오른 영조는 당쟁의 완화와 각 파에 걸친 공평한 인재등용에 힘쓰는 이른바 ‘탕평책’을 내세워 재위 52년간에 정쟁이 크게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 탕평책의 반작용으로 대간의 기능은 크게 위축되고, 언로는 모든 시비와 공격이 당쟁완화라는 명분으로 억제되어, 앞 시기의 긴장과 혈기가 풀리는 반면 공리주의 ·이기주의의 새로운 시대풍조를 조장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탕평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권세는 주로 노론의 수중에 있었다.
영조 말년부터 싹트기 시작한 새로운 대립은 1762년 임오사건, 즉 사도세자사건을 둘러싸고, 세자를 동정하는 홍봉한 중심의 시파와 세자의 실덕을 지적하고 영조의 처사를 옳다고 보는 김구주중심의 벽파의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그 후 남인과 소론도 시 ·벽으로 분파되었다. 이 시 ·벽파의 대립은 사도세자의 문제를 분쟁의 표면구실로 삼아 대립하게 되었고, 또한 남인의 시 ·벽파는 당시 전래하기 시작한 가톨릭을 믿는 신서교파와 반서교파로 분열되었다.
정조 때에는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남인의 세력이 왕에 의하여 적극 옹호 ·신장되어 이가환 ·정약용과 같은 남인 시파의 명사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의 벽파가 대거 진출하여 1801년 신유사옥을 일으켜 사학일소라는 명목 아래 많은 시파의 가톨릭 교인이 변을 당함으로써 당쟁의 한 변형이 연출되었다.
특히 시 ·벽의 대립으로 인한 가톨릭교의 박해는 서학도 내지는 실학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남인을 말살시켜 버린 결과를 가져왔다.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이 서학이나 실학에 전념하게 된 이유는 숙종 때의 갑술환국 이래 남인은 대개 폐족원국의 무리가 되어 과거를 위한 유학이란, 그들에게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조선 중 ·후기 정치의 큰 특징이 붕단간의 대립에 있었으므로 붕당정치는 그 시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 된다. 그러나 더 나아가 국왕의 위상과 역할을 깊이 이해하려는 연구 흐름도 나타나고 있으며, 붕당정치 대신 ‘사림정치’라는 개념으로 조선 중 ·후기의 정치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
동인: 조식, 이황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영남학파. 주리학적 도학을 주장함. 구한말 - 위정척사파.
서인: 이이, 성혼을 추종하는 기호학파. 주기철학을 주장. 구한말 - 개화파
이이가 죽자 파당으로 인한 대립은 점차 극심해져 치열한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1591년 세자책봉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득세하게 된다. 한편 1590년 왜의 동태가 수상 하다는 판단에 따라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등을 왜국에 보내어 그 곳 동향을 살피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돌아온 두 사람은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통신정사 황윤길은 왜국이 전쟁 준비에 한창이라고 하면서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고, 동인인 통신부사 김성일은 토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 것없고 군사 준비가 있음을 보지 못했기에 전쟁에 대비하는 것은 민심만 혼란하게 할뿐이라고 했다. 이런 의견 대립은 서인과 동인의 정치적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결국 동인의 세력이 우세했던 까닭에 김성일의 주장대로 전란 에 대비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김성일 의 주장과는 달리 이듬해 4월 왜국은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 해 왔으니 이것이『임진왜란』이다. (1592년 4월 13일).
7년 동안 지속된 임란이 끝나자 선조는 전란으로 인한 피해 복구와 민심을 안정 시키기 위해 전력을 쏟는다. 스스로 음식과 의복을 절제하여 사치를 배격 하는 한편 농토를 개간하고 양식을 절약하는 정책 을 실시해 민간경제를 바로 세우고자 하였다. 또한 민간의 사기를 돋우고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전란 중 에 공을 세운 사람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공신을 녹훈하였다. 하지만 선조의 전란 복구 노력은 거듭 되 는 흉년으로 쉽게 효과를 볼 수 없었으며 조정은 당쟁이 더욱 악화되어 혼란이 점차 가속화 되었다.
결국 선조는 전란의 뒷수습을 채 마무리 짓지도 못한 채 1608년 59세를 일기로 41년 동안의 치세를 마감해야 했다. 의인왕후를 비롯해 8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14남 11녀 의 자녀를 얻었다.
선조는 임란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유약하고 우유 부단한 왕으로 인식 되고 있지만 명종 시대의 혼란 을 수습하고 외척 정치를 없앴으며 신권 중심의 정치를 구현한 뛰어난 왕 이었다.
인목왕후 김씨(1584-1632) :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로 1600년 의인왕후가 죽자 1602년 19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606년 영창대군을 낳았다. 이 당시 광해군이 세자의 지위에 있었는데, 당시 실권자인 유영경은 적통론에 입각해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 이 즉위하자 유영경 일파는 몰락하고 대북파가 정권을 잡게 된다. 이들은 임해군을 제거하고 영창대군을 폐서 시켜 강화도에 유배하고 '7서의 옥' 이 발생하자 영창대군을 증살(烝殺)함. 또한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하고, 인목왕후로 폐비시킨 뒤 서궁으로 유폐시켰다. 대북파의 의견에 따라 저지른 광해군의 이같은 패륜행위는 인조반정의 구실이 됐으며, 이에 따라 광해군은 폐위되고 인목왕후 는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었다.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영창대군(1606-1614년) : 왕비에게서 태어난 유일한 적출이고 선조가 늦은 나이에 낳은 까닭에 부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선조는 광해군을 폐하고 그를 세자로 책봉할 생각을 품었다. 그러나 선조가 급사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1613년 서양갑, 박응서 등 권력가의 7명의 서출들이 역모 꾸몄다 하혀 옥에 갇힌 이른바 '7서의 옥'이 발생했다. 이때 이이첨 등은 그들이 역모를 위해 영창대군을 옹립 하고 김제남이 이를 주도했다는 진술을 유도한 후 김제남을 사사시키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에 위리안치했다가 증살시킴.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이 이끄는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그들은 선조의 유교를 염두에 두고 영창대군을 경계하였다. (선조는 죽으면서 대신들에게 영창대군 을 잘봐달라는 유교를 남김).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죽여야 한다는 대북 세력의 강력한 주장을 물리치고 자신의 판단으로 인목대비를 살려 놓기도 했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도 반대한 인물이었다.
대신들은 암암리에 영창대군 지지파와 광해군 지지파로 분리되고 말았다. 그러나 1608년 선조는 병이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처하자 현실적인 판단에 근거해 광해군에게 선위교서를 내린다. 그런데 선위교서를 받은 영의정 유영경은 이를 공포하지 않고 자기 집에 감추어 버린다.
이후 이일은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이이첨 등에 의해 발각되었고, 정인홍이 선조에게 이 사건을 알리면서 유영경의 행동을 엄히 다스릴 것을 간언 하지만 선조는 미쳐 결정을 내리지도 못하 고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왕위 계승의 결정권은 인목대비에게 넘어가고, 유영경은 인목대비 에게 영창대군을 즉위 시키고 수렴청정할 것을 종용하지만 인목대비는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 언문교지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시킨다.
임해군(1574-1609년) : 선조의 서출. 장남으로 광해군의 친형이다.
그는 성질이 난폭하고 군왕의 기질이 없다 하여 세자에 책봉되지 못했다. 그는 공공연히 왕위를 도둑 맞았다고 생각 했는데, 1608년 선조가 죽자 세자 책봉에 대한 서얼 문제가 명나라에서 다시 거론되어 현장 실사를 위하여 사신이 파견되었는데, 임해군이 문제를 발생시킬 소지가 있다 하여 대북파의 주청 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죽임을 당했다.
정철(1536-1593): 그의 큰누이는 인종의 귀인 정씨였으며 둘째 누이는 계림군 유부인임. 이 때문에 그는 어릴 적부터 궁중 출입을 자주 하였으며, 명종과도 어릴 적부터 벗으로 지냄. 그가 27세에 별시문 과에 장원급제하자 명종이 성대한 축하연을 베풀어 주었다. 당시 좌의정 이었던 정철은 세자 책봉에 관 한 문제를 우의정 유성룡, 부제학 이성중, 대사헌 이해수 등과 상의하고 선조에게 건저 할 것을 주청하려 했다. 또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와도 상의했다. 그러나 이산해는 선조가 인빈김씨 소생인 신성군을(임란 피난중 사망) 총애하는 것을 알고 인빈김씨의 오빠인 김공량과 결탁하여 정철이 광해군을 왕세자 로 올리고 그들 모자를 죽이려고 한다고 무고했다. 그러자 인빈김씨는 선조에게 이 내용을 전했고 선조 는 매우 진노했다. 이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정철은 경연장에서 건져 문제를 주청하자, 선조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대노 하였다. 유성룡,이산해 등은 침묵을 지켰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정철은 삭탈관직되고 같은 서인이었던 이성중, 이해수,등은 모두 강등 되어 외직으로 쫓겨났다. 정철이 실각하자 동인은 서인
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지고 조정은 완전히 동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동인은 이때부터 인조 반정이 있기까지 30여 년을 집권하게 된다.
그의 첫 벼슬은 사헌부지평이었는데 그가 이때 처음으로 다룬 일은 국왕의 사촌동생이 저지른 살인사건 이었다. 명종은 정철을 따로 불러 그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부탁 하였지만, 그는 왕의 부탁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를 사형에 처해버렸다. 이일에 화가 난 명종은 그를 지방으로 좌천시켰다.그의 강직한 성격 은 가는 곳마다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은 곧 당쟁의 불씨가 되었다. 친하게 지내던 이이로부터 조정 을 혼란 시키는 정쟁을 일삼치 말라는 충고를 받고 실망하여 낙향했던 것이다. 그는 중앙 관직에 머물 때는 언제나 주변 사람들과 부딪치며 격렬한 논쟁을 일삼는 파당적인 인물로 낙인이 찍히곤 했다. 하지만 그는 지방 수령으로써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으며 뛰어난 관리적 기질을 발휘하곤 하였다 .관동별곡, 훈민가,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의 한문과 한글로 된 가사와 수많은 시조와 한시를 창작 하여 한국 문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임진왜란과 김성일
조선이 임진왜란에 대비하지 못한 이유를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김성일의 보고에서 찾는 경향이 많다. 서인인 정사正使 황윤길이 ‘침략할 것’이라고 보고하자 동인인 김성일이 당파심에서 달리 보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조보감’ 선조 24년(1591)조는 ‘일본에 갔을 때 황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해서 김성일이 달리 말했다고 전한다.
풍신수길을 만날 때 황윤길은 뜰에서 절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김성일은 국왕이 아니라 관백關白이니 당堂 위에서 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만난 후에 답서도 주지 않고 현재의 오사카 계시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자 김성일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황윤길은 서둘러 떠났는데, ‘재조번방지’는 ‘억류를 당할까 두려워서’였다고 쓰고 있다. 겨우 받은 답서에 ‘조선국왕 전하’가 정승의 호칭인 ‘합하閤下’로 되어 있자 김성일 혼자 강하게 항의한 것도 그런 예다.
그러나 김성일은 유성룡이 “만약 병화兵禍가 있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말하는가?”라고 물었을 때는 “인심이 놀라 당황할 것이므로 해명한 것이다”라고 전쟁 가능성을 시인하기도 했다.
전란의 조짐은 김성일의 귀국 보고를 뒤덮을 만큼 많았다. 풍신수길의 답서에 ‘명나라에 쳐들어갈 테니 조선이 앞장서라’는 구절이 있어서 조야는 이미 충격을 받았다.
임란 1년 전 조선에 온 일본의 회례사 평조신은 침략을 공언했고, 이들을 접대했던 선위사宣慰使 오억령은 ‘명년(1592)에 침략할 것’이라고 정확히 보고했다. 그러나 선조를 비롯해 조정엔 전쟁을 생각하기 싫어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풍신수길이 미치지 않고서야 설마 공격하겠느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자신들은 전혀 몰랐다는 듯 김성일을 희생양 삼아 빠져나갔다.
임진왜란 (1592.4월-1597.11월)
경복궁,창덕궁,창경궁,등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이 소실되고 서적,미술품 등이 없어지거나 약탈 당했다. 또한 전란 때 명군이 지원한 데 대한 결과로 숭명사상이 더욱 높아지고, 그들에 의해 관우 숭배 사상이 전래되어 한양을 비롯한 여러 곳에 관우묘가 세워지는 등 민간 신앙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조선의 요청으로 대규모 원군을 파견 했고, 이 때문에 엄청나게 국력이 소모되었다.
그 때문에 국가재정이 문란해져 국방에 어려움이 초래되었다. 이러한 명의 국방력 약화는 여진족의 세 력 팽창을 방치하는 결과를 낳아 결국 여진족에 의해 명이 망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순신 (1545-1598년. 서울 건천동 출생)
그의 할아버지는 이백록은 조광조 등의 소장파 사림과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사화 때 참화를 당함.
그 후 아버지 이정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 만큼 그가 태어날 즈음 가세는 많이 기울어 있었다.
제15대왕 : 광해군 (1575-1641년. 재위 : 1608년 3월-1623년 3월. 집권 15년. 유배18년).
우여곡절 끝에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외교적으로는 실리적 외교론을 폈고, 내적으로는 왕권 강화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당쟁을 종식 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명분론에 입각한 서인들 의 음모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고 결국 폐위되어 폭군으로 기억되고 마는 비운의 왕이 된다. 그의15년 재위 기간동안 정권을 장악한 것은 대북파였다. 대북파는 정권유지를 위해 많은 정적을 제거했는데 이 때문에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과 서인들은 광해군 정권을 전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623년 김류 ,이귀,김자점 등 사대주의자들과 능창군의 형 능양군이(인조)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진격한다. 마침내 반정에 성공한 이들은 대북파를 제거하고 광해군을 폐위시킨다.
그들의 반정 명분은 광해군이 사대를 거부하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했다는 것이었다. 폐위된 후 광해군은 강화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이배 되어 18년 동안 생을 연명하다가 죽었다. 이기간 동안 그는 아주 초연한 자세로 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 하고 자기는 아랫방에 거쳐 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 이라고 호칭하며 멸시해도 전혀 이에 대해 분개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굴욕 을 참고 지냈다. 이렇듯 초연하고 관조적인 그의 태도가 생명을 오래토록 지탱시켰는지 모른다. 그러나 1641년 귀양생활 18년만에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폐비 유씨는 유배생활 1년7개월 만에 화병을 얻어 죽고 만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폐 세자와 세자빈은 두 달만에 자살하고 만다.
김직재의 옥(1612년) : 김경립이 군역을 회피 하기위해 어보,관인을 위조한 사건으로 대북파는 고문 과정에서 김직재는 자신이 역모의 주동자이며 연흥부원군 이호민 등 일군의 소북파 인사들과 모의하여 특정한날을 잡아 도성을 무너뜨리려 했다고 허위 자백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소북파 인사 100여 명이 대거숙청 당했다.
허균 (1568-1618년. 50세를 일기로 생을 마침)
시대를 변혁하기 위해 혁명을 꿈꾸던 사상가. 그의 아버지 허엽은 서경덕의 문하에서 성장하여 학자와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이복형 허성은 당대 뛰어난 문장가이며 임란직전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 옴. 또 그의 동복누이 허난설헌은 황진이와 더불어 한국 여류문학의 양대산맥으로 불릴 만큼 셈세 하고 뛰어난 문장력을 과시 하기도 했다.
그는 26세 때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597년 문과중시에 장원 급제함. 1613년 '칠서의 옥' 란 때 평소 친분이 있던 서출인 서양갑, 심우영 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파에 가담했으며, 이이첨의 주선으로 형조참판에 임명되고 1615년 승문원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명나라에 갔을 때 중국문헌에 조선 종묘사에 대한기록이 잘못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정정시켜 광해 군의 신임이 두터워졌다. 이때부터 그는 광해군의 총애를 받아 광해군으로부터 '그대의 충성은 해와 달 처럼 빛나고 있다'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그리고 일약 형조판서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좌참찬이 되어 인목대비 폐모론을 주장해 성사시킨다. 그러나 그는 그 즈음 역모를 꿈꾸고 있었다. 서얼차별을 없앨 뿐 아니라, 신분계급을 타파하고 붕당을 혁파해야 한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현실화 시키기 위해 혁명을 꿈꾸었다. 그는 또 '북방에 오랑캐가 쳐들어왔고, 남쪽에서 왜구가 쳐들어와 남쪽 섬을 점령하고 대군을 상륙시키려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린다. 이 소문이 점차 미간 속으로 파고들어 효력을 발휘하자 그는 남대문에 이내용을 붙이게 하였다.
방이 나붙자 장안은 온통 전쟁 분위기에 사로잡혀 도성민들 중 에는 황급히 피난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부하 현응민이 도성을 출입하다 불심 검문에 걸려 거사 계획을 발설 한 것이다. 현응민으로 부터 모반계획을 파악한 이이첨은 군사를 이끌고 허균집을 내사하여 그와 반란 인물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허균을 역모 혐의로 능지처참에 처했다. 이로써 20년 가까이 준비해온 혁명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50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에 대해 총명하고 영리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칭찬을 아끼 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인격에 대해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며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다섯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게 그러한 부정적인 소견 을 대변해 주고있다. 『홍길동전』『엄처사전』『손곡산인전』『장산인전』『장생전』『남궁선생전.등 을 남겼다.
제16대왕 : 인조(1595-1649년. 재위 :1623-1649년.5월. 집권 26년2개월.55세를 일기)
인조 반정의 명분
첫째 명에 대한 의리를 져 버리고 대명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
둘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형제를 죽이고 불효를 했다는 것.
그러나 광해군은 대북파 들이 인목대비를 죽여야 한다는 주장을 물리치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도 반대 했다. 그리고 청과 명에 대해 중립적인 외교로 실리를 취했으나, 인조는 대명 사대주의에 빠졌고 병자호 란이 일어나자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릅을 꿇는 치욕을 당했다. 인조반정으로 정인홍, 이이첨 등은 사형을 당했고, 대북세력 200명 모두 숙청 당함. 인조는 친명 사대주의를 표명하여 정국의 안정을 도모 하려 했으나 이괄의 난, 청의 침입 등으로 엄청난 혼란을 겪고 결국 청과 군신관계를 맺는 삼전도의 치 욕을 당한다. 이괄의 난은 인조가 한성을 버리고 도주했을 정도로 조선 조정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이괄이 북방 주력부대를 이끌고 내려옴으로써 변방의 수비에 허점이 생겨 후금의 침략을 용이하게 했다.
소현세자(1612-1645년) : 인조의 맏아들. 1637년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이 있자 자청 하여 봉림대군 및 척화파 대신들과 함께 심양에 인질로 잡혀 갔다. 그는 단순한 인질이 아닌 외교관의 소임도 맡아 청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 담판을 짖거나 막기도 했다. 때문에 청은 조선과의 문제 를 그와 해결 하려 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의 왕권이 둘로 나누어지는 양상을 가져왔다.
1645년 그가 귀국 했을 때 인조는 철저한 친 청주의자로 돌아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청에서 가져온 서양 문물조차도 수용하지 않는 용렬한 모습을 보였다. 입국 후 두 달 뒤에 병으로 드러누웠고 3일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인조의 주치의인 이형익이 3차례나 침을 놓았고 그 뒤 3일만에 죽었는데 그의 온몸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뱃속에는 피가 쏟아 졌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에 따라 그가 인조에 의해 살해됐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세자빈도 이듬해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세 아들도 제주도로 귀양 가 두 명은 풍토병에 걸려 죽었다..
봉림대군 : 그는 청나라에 머물면서 형 소현세자와 함께 지내면서 그를 적극 보호 하였으며,청나라가 산해관을 공격할 때 소현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이를 극렬 반대하고 자신이 대신 가게 해 달라고 고집 하여 청의 요구를 막았다. 8여 년의 볼모생활 동안 많은 고통과 고생을 격으면서 반청사상을 정립시킨 그는 1645년 먼저 귀국한 소현세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그해 9월 세자에 책봉되고,1649년 5월 인조가 죽자 31세의 나이로 조선 제17대 왕으로 등극했다.
병자호란(1636년) : 1636년부터 정묘조약 때 맺은 '형제의 맹약' 을 군신관계로 개악하고자 하면서 황금과 백금일백냥,전마 3천필,정병3만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해왔다. 후금의 요구사항이 터무니없이 늘 어나자 조선은 화의조약을 깨고 후금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개칭하고 태종은 황제의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해 12월1일 청태종은 청군7만,몽고군3만,한 2만 등 12만을 이끌고 압록강을 쳐내려 왔다. 청군은 임경업이 지키고 있던 의주 백마산성을 피해 직접 한성으로 진군하였다.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한편 청군은 12 월16일 남한산성에 도착했고, 청 태종은 1월1일 군사를 20만으로 늘려 남한산성 밑 탄천에 포진하고 있었다.이후 별다른 싸움없이 40여일이 경과하자 성안의 식량은 떨어지고 군사들은 피로에 지쳐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게 됐다. 그러는 사이 강화도가 함락됐다는 보고가 있자 성안은 술렁대기 시작했고 인조 는 별수없이 항복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의 요구사항은 총11 가지였다.
청에 대해 신하의 예를 갖추고,명 과의 교호를 끊을 것 ,청에 물자 및 군사를 지원 할 것, 청에 적대 하 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말고 곡물을 보낼 것 등이었다. 이 조약이 체결되자 1637년 1월30일 인조는 세 자와 함께 서문으로 나가 한강 동편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릅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춘 뒤 한성으 로 되돌아 왔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는데, 이관계는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된다. 병자호란을 통해 굴욕적인 역사를 남기게 된 것은 당시의 집권당인 서인과 인조가 지나친 대명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광해군의 실리주의 노선을 제대로 살렸더라면 변란은 문론이고 그 동안 중국과 맺어 오던 군신 관계를 청산하고 국력을 신장 할 수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괄의 난
이괄은 인조반정에 공이 많았는데도 논공행상에는 반정계획에 늦게 참가하였다 하여 2등 공신이 되었으며 한성부윤에 임명되었다.
그러던 중 관서 지방에 호인胡人이 침입할 염려가 있다 하여, 이괄을 도원수 장만張晩 휘하의 부원수副元帥 겸 평안병사로 좌천시켜 평안도 영변寧邊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에 그의 불만은 더욱 커져 반란을 꾀하게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전교수前敎授 문회文晦의 밀고로 미리 알고 서울에 있던 이괄의 아들을 체포하였다.
이괄은 그의 부하 이수백·기익헌, 구성부사인 한명련과 함께 가까운 병영의 군사 1만여 명과 항왜병 100여 명으로 먼저 개천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삼아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는 한편, 반란군과 내응할 것을 염려하여 전 영의정 기자헌 등 35명을 처형하였다.
반란군은 평안도의 순천·자산·중화, 황해도의 수안·황주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평산으로 진격하였다.
중앙에서 파견한 토벌군과 장만이 이끄는 추격군은 합세하여 저탄에서 반란군과 싸웠으나, 도리어 반란군에게 패하였고 반란군은 승승장구하여 경기도의 개성·벽제에 이르렀다. 이에 인조는 공주로 피란을 갔고 한성은 반란군에게 점령되었다.
이괄은 1624년 2월 11일 선조의 열 번째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를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바로 그 날 밤 장만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반란군을 한성 근교의 안령에서 대파하였다.
이괄은 패잔병을 이끌고 광희문을 빠져 나와 경기도 이천으로 달아났으나, 전부대장 정충신의 추격을 받았다. 이에 이괄의 부하 기익헌·이수백 등은 자기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이괄·한명련 등 9명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하여 반란은 평정되었다.
이괄의 난 때 춘추관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이 불타고 말았다.
상평통보 [常平通寶] - 조선시대의 화폐.
1633년(인조 11) 김신국(金藎國)·김육(金堉) 등의 건의에 따라 상평청(常平廳)을 설치하고 주조하여 유통을 시도했는데 결과가 나빠 유통을 중지하였다. 그후 1678년(숙종 4) 정월에 다시 영의정 허적(許積), 좌의정 권대운(權大運) 등의 주장에 따라 상평통보를 다시 주조하여 서울과 서북 일부에 유통하게 하였다. 그 뒤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 유통하게 했는데, 조선 말기에 현대식 화폐가 나올 때까지 통용되었다.
제17대왕 : 효종(1619-1659년.재위 : 1649-1659년 5월. 집권 10년.41세를 일기.)
소현세자와 함께 오랫동안 볼모 생활을 하며 반청 감정을 강하게 키웠던 효종은 왕으로 등극하자 곧 친 청세력을 몰아내고 척화론자들 을 중용하여 북벌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 하였다. 이같은 계획은 끝내 실 행에는 옮기지 못했지만 그 덕택으로 국력이 강해져서 사회 안정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제1차 나선 정벌 : 1654년 6월 청은 조선 조총군사를 뽑아 영고 탑에 보내 줄 것을 요청했고 청나라 군사와 함께 나선 병력을 흑룡강 이북으로 후퇴시켰다.
제2차 나선(러시아)정벌 : 1658년 청은나선군이 10여척의 배에 군사를 싣고 당당한 기세로 다가왔는데 청군은 겁을 먹고 감히 그들에게 대적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군이 화력으로 적선을 불태우 자 나선군은 흩어졌고 이후 흑룡강 부근에서 활동하던 나선군은 거의 섬멸됐다. 두 번의 나선 정벌은 조선군의 사기를 한껏 높여 이후에도 나선정벌을 핑계로 조선은 산성을 정비하고 군비를 확충하여 북벌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표류해온 네들란드인 하멜을 훈련도감에 수용하여 조총, 화포 등의 신무기 를 개량, 보충하게 하고 필요한 화약 생산을 위해 염초 생산에 매진 하였다. 그러나 효종은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5월 4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효종이 확립한 군사력은 조선 사회의 안정 을 위한 기반이 되었다.
김자점의 옥 [金自點-獄] 1651년(효종 2) 김자점의 반역행위로 야기된 옥사.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즉위하여 효종이 되자 병자호란으로 당한 국치를 설욕하고자 김상헌金尙憲 등 신하와 협의하여 청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본래 친청파였던 김자점은 영의정에서 파직된 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차 그 소식을 듣고 청나라 관계 요인에게 밀고하는 한편, 송시열이 지은 장릉長陵의 지문을 청나라에 보냈다. 이 지문에서는 청나라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고 명나라 연호를 썼으므로, 이에 청나라는 대군大軍을 국경에 배치하고 그 진부를 힐문詰問하였다.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의 노력으로 일단 수습되었으나, 1651년(효종 2) 12월 진사 신호申壕 등이 다시 상소하여 김자점의 역모를 고하였다.
효종이 인정문仁政門에서 김자점의 아들 익(?) 등을 심문하자 익은 공모한 무장들을 모두 실토하여 여러 명이 희생되었으며, 인조의 후궁 조귀인(趙貴人:효명옹주의 어머니)이 그의 며느리인 숭선군崇善君의 아내 신씨申氏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나자 조귀인을 사사賜死하는 한편, 김자점 및 그의 손자이며 조귀인의 사위인 김세룡을 국문하여 이들을 처형하였다. 이로써 김자점의 일파는 완전히 숙청되었다.
제18대왕 : 현종(1641-1674년.재위 : 1659년-1674년. 집권 15년 3개월.34세 일기.)
현종 시대는 밖으로부터 외침이 일체 없었고 내적으로는 사회가 안정을 되찾았기 때문에 비교적 평화 로운 시대였다. 그러나 집권 15년 동안 예론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정쟁 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송(禮訟)론쟁 : 현종, 숙종 대에 걸쳐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 대비(인조의계비 장렬왕후)의 복상 기간을 둘러 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임 간의 논쟁을 말한다.이 논쟁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왕실의 전례 문제인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 보면 예를 최고의 덕으로 여기던 성리학의 핵심 문제이다. 율곡학파인 서 인과 퇴계 학파인 남인간의 정권주도권을 둘러싼 이념 논쟁이었다. 이것은 표면적으론 단순한 학 문적 언쟁인 것 같지만 파고들면 효종의 왕위계승에 대한 정당성을 묻는 것이었다. 당시 선비들에게는 목숨 을 걸만한 중요한 사안이었다. 장자인 소현세자가 죽자 그의 아들인 석철이 왕위를 이어야 했지만 인조는 소현세자에 대한 증오감 때문에 세손이 아닌 둘째 아들 봉림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한다.
남인과 서인의 예론정쟁
효종이 죽자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장렬왕후 조씨)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정쟁화 되었다. 이 무렵 조선 조정은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세력과 인조의 중립에 정책으로 기용된 남인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인조, 효종 대에 남인은 주로 영남학파의 주리론을 주장하고 서인은 기호학파의 주기론을 주장하는 학문적인 대립을 벌였으나, 현종 대에 와서는 본격적인 정치 논쟁을 일 삼곤 했다. 예론 역시 처음에는 학문적인 대립에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정쟁으로 확대된 사건이었다. 당시 조선의 일반 사회에서는 주자의 '가례'에 의한 사례의 준칙이 지켜지고 있었지만 왕가에서는 성종 때 제도화 된 '오례의'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오례의'에는 효종과 자의대비의 관계와 같은 사례가 없었다. 효종인 인조의 맏아들로 왕위에 있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가 차남이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상중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에게 행하는 예로써 3년상을 치렀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하여서는 몇 년상을 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에 직면하자 서인의 송시열과 송준길 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당연히 기년상(1년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남인의 허목과 윤휴는 효종 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과 다름없기에 3년상이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서인과 남인의 이 복상 논쟁은 극단적인 감정 싸움으로 치달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정쟁으로 확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정쟁은 지방으로 확대되어 재야 선비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 되었 다. 결국 효종의 상중에 일어난 이 논쟁에서 서인의 기년상이 채택됨으로써 남인의 기세는 크게 꺾였다. 그럼에도 남인의 반발이 심상치 않자 1666년 현종은 기년상을 확정 지으며 더이상 그 문제를 거론하지 말 것을 엄명했고,만약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는 포고문을 내렸다. 그러나 복상 문제는 1673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쟁점으로 부각 되었다. 이번에도 서인측은 효종이 차남이 라는 점을 강조하며 대공설(9개월)을 내세웠고, 남인측은 그녀가 비록 자의대비의 둘째 며느리이긴 하나 중전을 지 냈으므로 큰 며느리나 다름없다면서 기년설(1년)을 내세웠다.현종은 이때 장인 김우명과 그의 조카 김석주의 의견에 따라 남인측의 기년설을 받아들여 자의대비로 하여금 기년 복상을 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서인은 실각하였고 현종 초년에 벌어진 예론도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그 런데 1674년 8 월 현종이 죽자, 송시열은 다시 예론을 거론하며 자신의 종래 주장이 옳았음을 피력하다가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고, 이 후 서인 세력이 정계에서 밀려나고 남인이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이 예론 정쟁 의 파장은 '현종실록'에 까지 영향을 미쳐 숙종 대의 경신대출척(1680년)이후 다시 집권한 서인에 의해 실록이 개수되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한다.
제19대왕 : 숙종(1661-1720.재위 : 1674년8월-1720년6월. 집권 45년10개월.60세일기)
숙종은 현종의 외아들로 명성왕후 김씨 소생이다. 7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 되었고 1674년 14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곧바로 친정을 시작하였다.숙종 시대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당파간의 정쟁이 가장 심했으나,숙종은 비상한 정치 능력을 발휘하여 왕권을 회복하고 사회를 안정시켰다.
임란과 병자호란 이후 계속되던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민생을 안정시켜 조선사회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 한 왕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중전과 후궁들에 대한 애증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숱한 옥사를 유발하여 치세에 흠을 남기기도 했다.
1688년 숙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소의 장옥정(장희빈)이 왕자 균을 낳자 숙종은 이듬해 그 를 서둘러 원자에 정하려 했는데, 서인측이 정비 인현황후 민씨가 아직 젊어 왕자균을 원자로 확정하는 것은 시기 상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숙종은 서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일만에 왕자 균을 원자에 정호하고 생모 장씨를 빈으로 승격시켰다. 이에 대하여 서인의 노론측 영수 송시열이 송나라 철종의 예를 들며 왕자 균을 원자로 세우는 것은 급한 일이 아니라는 상소를 올린다. 이 때문에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계 정치 인 들이 대거 유배되고 상소를 올렸던 송시열은 사사된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중전 민씨가 폐위 됨으로써 희빈 장씨가 중전에 앉고 원자 균은 세자에 책봉된다.
1694년 노론계 김춘택과 소론계의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 복위 운동을 전개한다. 권력을 잡고 있던 민암, 이의징 등은 폐비 복위운동 관련자들을 모두 하옥하고 이들을 심문한 다음 숙종에게 보고한다. 하지만 이 당시 숙종은 중전 장씨에 대한 감정 이 악화 되어 있었고 민씨를 폐위 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던 중이라 오히려 민암 등의 남인을 축출해 버린다. 그리고 중전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 시키고 폐비민씨를 복위시켰다. 민씨가 복원되고 빈으로 강등된 희빈 장씨는 중전으로 복위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1701년 인현왕후 민씨가 죽은 뒤에 희빈 장씨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서 민씨를 저주하기 위한 신당이 발견되어 다시 한 번 옥사가 일어난다.
희빈 장씨는 그 신당에 무당을 데려와 굿을 하며 인현왕후가 죽기를 빌었고, 이사실을 안 숙종은 진노 하여 그녀를 자진케 했는데 이를 듣지 않자 사약을 내렸다.이로써 소론은 세력이 대폭 축소되고 노론이 대거 조정에 진출하게 된다. 이 사건은 무속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 ‘무고의옥’이라고 한다. 숙종은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 민씨폐위 사건에서 보듯이 애정의 편향이 심하여 그 것을 정치쟁점화 시켜 당쟁 을 격화시키는 흠을 남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그의 통치 전반을 평가해 볼 때 왕권 강화를 위해 고의적으로 반복하던 환국정치의 일면으로 해석 될수있다. 그는 환국이라는 방법으로 세 번에 걸쳐 정 권을 교체하면서 붕당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그 반대 급부로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여 왕권을 강화 했다.
숙종은 용사출척권을(왕이 정계를 대개편 하는 권한) 통한 환국 정치로 왕권을 강화했다. 붕당의 한계성 은 군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파당은 반드시 몰락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점을 적절히 이용하여 특정 파당이 지나치게 힘이 강해지면 대출척을 감행함으로써 정국의 전환을 꾀하곤 하였다.
‘환국(換局)’ : 정국 전환을 뜻함.
이같은 환국정치로 왕권을 강화시키며 조선을 안정시켰던 숙종은 1720년 약46년간의 통치를 끝내고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숙종은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등 세명의 왕비를 맞이했지만 그들에게서는 아들을 얻지 못하고 나인출신 희빈 장씨와 무수리 출신의 숙빈최씨에게서 아들을 낳았다.
숙종의 업적
숙종의 업적경상도와 황해도까지 대동법을 실시하여 그 적용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시킴으로써 광해군 이래 계속된 세입일원화 계획을 완성시켰고 또 광해군 때에 시작된 양전 사업을 계속 추진하여 강원도와 삼남 지방에 실시함으로써 서북 지 방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국에 걸친 양전을 사실상 종결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화폐 주조 사업을 본격화하여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상평청, 호조, 공조 및 훈련도감, 총융청의 군영과 개성부, 평안, 전라, 경상감영으로 하여금 상평통보를 주조 하여 통용케 했다. 숙종 치세에 이루어진 이같은 경제 정책은 조선 후기의 상업 발달과 사회 경제적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한편 국방과 군역 문제에서도 여러 가지 조치가 취해졌는데, 먼저 대흥산성, 황룡산성 등 변경 지역에 성을 쌓고 대대적인 도성 수리 공사를 하였다. 특히 이유의 건의에 따라 북한산성을 총체적으로 개축하여 남한산성과 함께 서 울 수비의 양대 거점으로 삼았다. 또한 효종 시대 이후 논란을 거듭하던 훈련별대와 정초청을 통합하여 금위영을 신 설하고 5군영 체제를 확립하여 임진왜란 이후 계속 추진하던 군제 개편 작업을 끝마쳤다. 이밖에도 양역이정청을 설 치하여 민폐의 첫번째 요인이던 양역 문제의 해결을 꾀하기도 했는데 그 결과 군포 균역절목이 마련되어 이전에는 양전 1인의 군포 부담이 1필에서 4필까지 심한 차이를 보이던 것이 2필로 균일화됨으로써 민간의 부담을 줄였다. 이즈음 국방과 관련하여 영토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조선은 사군이 설치되었다. 폐쇄되었던 폐사 군지에 다시 2진을 설치하여 고토 회복운동을 벌였고 이 결과 압록강 연변에 조선인의 출입이 잦아지게 되어 청나라와 국경 분 쟁이 일어나자 1712년 청나라측과 협상하여 정계비를 세워 영토의 경계선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일본에도 통신사를 파견하여 막부 정권을 상대로 협상을 벌여 왜인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음으로써 울릉도 귀속 문제를 확정지었다. 문화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숙종 시대는 정치적으로 명분 의리론이 크게 성행하였기 때문에 명에 대한 은공을 갚는 다는 의미로 대보단이 세워지고 성삼문 등 사육신이 복관되었으며 노산군을 복위시켜 묘호를 단종으로 올렸다. 뿐 만 아니라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던 소현세자 빈 강씨를 복위시켜 면희빈으로 하는 등 왕권 강화 측면에서 왕실의 충 역 관계를 재정립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300여 개의 서원사우가 건립되고 그 중에 131 개소가 자연 폐쇄되는 서원 누수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또 이 시기에는 '선원계보' '대명례집' '열조수교' 북관지' 등이 편찬되었으며 '대전속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신 전자초방' 등이 간행되었다.
숙종의 용사출척권
숙종은 이른바 용사출척권(왕이 정계를 대개편하는 권한)을 통한 환국 정치로 왕권을 강화시켰던 왕이다. 그는 정 국 전환을 뜻하는 '환국'이라는 방법으로 세 번에 걸쳐 정권을 교체하면서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그 반대급부 로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여 왕권을 강화시켜나갔다. 그가 이같은 환국 정치를 구상하게 된 배경은 정확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붕당의 한계성을 정확하게 꿰 뚫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꿰뚫고 있던 붕당의 한계성은 바로 군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파당은 반드시 몰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점을 시의적절하게 이용하면서 특정 파당이 지나치게 힘이 강해지면 대출 척을 감행함으로써 정국의 전환을 꾀하곤 하였다. 그는 환국 정치를 이끌어가면서 허적, 윤휴, 이원정, 송시열, 김수항, 박태보 등 수많은 뛰어난 신하들을 희생시켰 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자신의 부인인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거나 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죽이기까지 했다. 숙종의 이같은 환국 정치에서 비롯된 사건들을 열거해보면, 남인이 대거 축출당하는 1680년의 경신환국, 왕자 균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서인이 제거당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는 1689년의 기사환국,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통 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의 소론이 집권하게 되는 갑술환국, 그리고 이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1701년의 '무고 의 옥'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인현왕후 민씨(1667-1701년) : 예의가 바르고 덕성이 높아 국모로써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하지만 왕자를 낳지 못하여 왕의 총애를 받지 못했으며 당시 소의였던 희빈 장씨가 왕자 균을 출산하자 정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설움을 당해야 했다. 1701년 소생없이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한 궁녀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인현왕후전』이 전해지고 있다.
인원왕후 김씨(1687-1757년) : 민씨가 죽자 간택되어 궁중에 들어가 다음해에 왕비로 책봉. 숙종이 죽은 뒤 왕대비에 올랐고 경종이 죽은 뒤 대왕대비.
희빈 장씨(1659-1701년) :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의 시종으로 있다가.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다. 1686년 숙원이 되고 1688년 소의로 승격되었으며 이때 왕자 균을 낳아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 하게 된다. 궁녀에서 후궁생활을 거쳐 왕비에 오르기까지 했던 희빈장씨는 수많은 풍문과 일화를 남긴 채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숙종은 그녀의 처사에 분개한 나머지 이후로는 빈이 후비로 승격 하는 일을 법으로 금지해 버리기까지 했다.
제20대왕 : 경종(1688-1724년. 재위 : 1720년 6월-1724년8월. 집권 4년2개월. 37세일기.)
경종은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희빈장씨 소생이다. 이름은 균이었다. 왕자 균은 생후2개월이 될무 렵 숙종의 정비인현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어 원자 정호를 받았으며 3세 때 세자에 책봉되었다.
노론계는 중전의 나이가 아직 한창인데 태어 난지 두 달밖에 안된 후궁 소생을 원자로 정하는 것은 부당 하다고 했다. 이에 숙종은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워 종사의 대계를 늦출 수 없다고 하면서 서인 노론측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5일만에 왕자 균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그의 생모인 장씨 를 빈으로 격상시켰다. 이에 송시열의 반대 상소가 올라오자 숙종은 이미 종묘사직에 고하여 원자로 확정 했는데도 이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왕을 능멸하는 처사라고 지적하며 심하게 분노했다. 이 때문 에 송시열이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세자 균은 33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경종은 왕궁의 법도에 따라 즉위하긴 했으나 병으로 인해 제대로 정사를 돌볼 수가없었다. 이에 당시 집권당 이었던 노론측은 숙종의 유명을 받들어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다. 그리하여 세제책봉이 거의확실 했지만 연잉군은 소를 올려 왕세제의 자리를 극구 사양하였다. 이는 왕위를 탐하고 있지 않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한 연잉군 나름의 자구책 이었을 것이다. 선뜻 왕세제 자리를 욕심내게 된다면 그것은 왕위 를 넘보고 있었다는 의심을 받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경종 시대는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정권 다툼으로 조정이 항상 피바람에 휩싸였고 이 때문에 경종은 재위 4년간 뚜렷한 치 적을 남기지도 못했다. 경종은 재위4년2개월 만에 37세를 일기로 죽었으며 슬하에 자녀는 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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