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21대~27대

2019. 5. 9. 15:47역사

제21대왕 : 영조(1694-1776. 재위: 1724년8월-1776년3월. 집권 51년7개월. 83세일기.)

노.소론의 치열한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명의 위협 마져 느끼며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영조는 등극 하자마자 붕당의 폐해를 열거하며 탕평 정국을 열어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한다. 탕평 정국이 오래 지속되자 각 당파들은 다시 정권을 독점하기 위한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 적인 사건이「사도세자사건」이다.


1749년 영조는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로 하여금 대리 청정을 하게한다.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남인,소론,소북세력 등은 그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노론세력과 그들에 동조하던 계비 정순왕후김씨,수의 문씨 등이 세자와 영조사이를 벌여 놓기 위해 이간질을 하였다.세자에 대한 정순왕후, 숙의 문씨 등의 무고에 따라 영조는 자주 세자를 불러 질책 하였으며 이 때문에 세자는 정신적 압박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함부로 궁녀를 죽이거나 왕궁을 몰래 빠져 나가는 등 돌발적인 행동을 하였다.


1762년 세자가 임금도 모르게 관서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온 일이 발생했다. 세자를 제게 할 기회를 노리 고 있던 노론측의 윤재겸 등이 세자의 행동이 체통에서 벗어났다는 주장을 담은 소를 올리자 영조는 세자의 관서순행에 관여한 자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또 계비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윤급,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이 때문에 영조는 분노를 참지 못 하고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하지만 세자가 이에 응하지 않자 그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뒤주 속에 가두어 8일만에 굶어 죽게 하였다. 세자나이는 28세였다.하지만 영조는 이 사건 이후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思悼 라는 시호를 내리고 신주에 제주를 하면서 나라의 앞날을 위해 행한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알리기도 하였다.


이후 영조는 붕당의 근거지로 활용되던 서원, 사우의 사사로운 건립을 금지시켰으며, 1772년에는 과거 시험으로 탕평과를 실시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경제 정책에서는 균역법을 시행하고, 오가작통 및 이정의 법을 엄격히 준수 하도록 해 탈세를 방지했다. 1763년에는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 이 고 구마를 가져와 식량 수급에 획기적인 전환을 꾀할 수 있었다. 영조는 왕세제 때부터 숱한 당쟁에 휘말 리며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슬기롭게 극복 하고 정국을 탕평책으로 주도하면서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 를 마련하였으며 1776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조선 27왕 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가장 장수한 왕이었다.

 

이인좌의 난 [李麟佐-亂]  조선 후기 이인좌 등의 소론(少論)이 주도한 반란. 

일어난 해의 간지를 따서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한다. 소론은 경종 연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노론과의 대립에서 일단 승리하였으나, 노론이 지지한 영조가 즉위하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박필현 등 소론의 과격파들은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죽음에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 탄密豊君 坦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남인들도 일부 가담하였다.

한편 이들의 거병에는 유민流民의 증가, 도적의 치성, 기층 민중의 저항적 분위기가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반군은, 지방의 사족과 토호가 지도하고 중간계층이 호응하며, 일반 군사는 점령지의 관군을 동원하거나 임금을 주어 동원하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이인좌는 1728년(영조 4) 3월 15일 청주성을 함락하고 경종의 원수를 갚는다는 점을 널리 선전하면서 서울로 북상하였으나 24일에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 격파되었고, 청주성에 남은 세력도 상당성에서 박민웅朴敏雄 등의 창의군에 의해 무너졌다. 
영남에서는 정희량이 거병하여 안음·거창·합천·함양을 점령하였으나 경상도관찰사가 지휘하는 관군에 토벌당했다. 호남에서는 거병전에 박필현 등의 가담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난의 진압에는 병조판서 오명항 등 소론 인물들이 적극 참여하였으나, 이후 노론의 권력장악이 가속화하였고 소론은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정부에서는 지방세력을 억누르는 정책을 강화하였고 토착세력에 대한 수령들의 권한이 커져 갔다. 또한 이때 반군이 군사를 동원한 여러 방식은 뒤의 홍경래의 난으로 이어졌다. 
 

 

정순왕후 김씨(1745-1805) :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가 죽자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어 66세의 영조와 가례를 올렸다. 소생은 없고 영빈소생의 사도세자를 미워하여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를 받아 모함했으며, 나경언이 세자의 10가지 비행을 상소하자 그를 서인으로  폐위시켜 뒤주 속에 가두고 굶어 죽게 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4년간 한다.(순조는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함.)

 

혜빈 홍씨(1735-1815년) :영의정 홍봉한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아버지 홍봉한과 숙부 홍인한 은 외척이면서도 세자의 살해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던 까닭에 그녀는 세자의 참담한 운명을 그냥 지 켜볼 수 밖에 없었다.「한중록」을 남겼다. 이는 궁중 문학의 효시가 되고 있다.

 

사도세자(1735-1762년) : 영조의 둘째 아들이며 영빈 이씨의 소생이다. 영조가 40세 넘어서 출생한 탓으로 2세 때 세자에 책봉되고 10세 때 혜빈홍씨와 가례. 15세 때 서정을 대리함. 이때 그를 싫어하던 노론들과 영조의 계비정순왕후 김씨, 숙의문씨 등이 그를 무고했다. 영조는 수시로 그를 불러 꾸짖었다.이로 인해 그는 정신 질환의 일종인 조울증에 시달린 듯함.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 하자 영조는 분개했고 세자에게 자결을 명령하나 부왕의 명을 거부하자 뒤주에 가둬 8일 만에 굶겨 죽였다. 그 때 세자의 나이는 28세임.

 

제22대왕 : 정조(1752-1800년. 재위:1776.3월-1800.6월. 집권 24년 3개월. 49세일기).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빈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죽자 횡사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 로 입적되어 제왕수업에 들어갔다. 8세의 나이로 세손에 책봉되었다. 이후 1775년 82세의 연로한 영조 가 대리청정을 시켰고 이듬해 영조가 죽자 그는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즉위한다. 정조는 항상 죽음의 위협 속에서 세손시절을 보내야 했고 이 기간 동안「홍국영」의 도움을 받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지켜 갔고 철저히 내면을 숨기며 살았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자 그의 태도가 달라졌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감행 하는 한편,파당을 배격하고 새로운 인물을 대거 등용해 친위세력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세손 시절부터 줄곧 그를 경호하던 홍국영을 동부승지로 전격 기용했다가 다시 도승지로 승격 시켰으며 날랜 병사들을 뽑아 숙위소를 창설하여 왕궁을 호위하게하고 홍국영으로 하여금 숙위대장을 겸직하도록 했다.이처럼 정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홍국영은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삼사의 소계,팔도의 장첩,묘염,전랑 직의 인사권을 모두 총괄하였고,이에 따라 백관들은 물론 8도감사나 수령들 까지도 그에게 머리를 숙이 게 되었다. 그리고 누이동생 을 정조의 후궁이 되게 함으로써 정권 을 한 손에 쥐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정조의 후궁으로 바친 누이동생 원빈은 입궁한지 얼마되지 않아 죽었고, 정조 또한 그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경계했다. 정조는 그가 스스로 조정에서 물러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홍국영은 오히려 정권을 독점하기 위해 왕비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가 이것이 발각되어 1780년 집권4년 만에 가산을 몰수당하고 전리로 방출 되었다. 정조시대는 양반,중인,서얼,평민 층 모두가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집약시킨 문예부흥기였다. 그러한 문예 부흥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동력은 병자호란이후 청을 오랑캐로 인식하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어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긍심이었다.

 

실학 : 조선 후기에 대두된 일련의 현실 개혁적 사상체계를 말하는 것으로 정주 성리학에 바탕을 둔 사회 체계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현실 속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를 구현하려는 공통성을 갖고 있다.이수광,유형원 등을 선구로 시작된 이같은 실학은 이익, 안정복,박세당, 홍대용을 거쳐 박지원,정약용, 이덕무, 박제가에 이르러 집대성 되고 19세기 말의 개화 사상가들에 의해 재발견된다.
이들은 모두 새로운 사회건설을 통한 새로운 시대를 염원했다.

 

제23대왕 : 순조(1790-1834. 재위: 1800-1834년. 집권 34년.)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이며 수빈박씨 소생이다. 1800년 정월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그 해 6월에 정조가 죽자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 한다. 그러자 영조의 계비이며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 하게 되었다. 그는 순조1년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고 천주교도를 잡아들이기 위해「오가작통법」을 썼다.정순왕후는 근 5년 동안의 수렴청정을 거두고 물러앉은 뒤 1년만에 죽는데 벽파의 기둥이었던 그가 죽 자 벽파는 다시 몰락의 길을 걷는다. 1802년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비로 맞아들인다. 이때부터 영안 부 원군 김조순 일문에 의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60여 년간 이어진다.


순조 시대에는 김조순이 정권을 전단하다가 헌종대에는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 에게로 넘으가고 ,철종 대에 와서는 김좌근의 양자 김병기에게로 넘어간다. 세도 정권의 특징 이라면 당쟁시대와는 달리 견제 세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이 어린 왕을 정권에서 배제시켜 버리는 세도 정권의 전횡을 가능 하게 했으며, 그 결과 관료사회의 부패와 백성을 상대로 한 수탈과 민생의 피폐가 나타났다. 
농민들의 불만은 순조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 비롯,19세기 중협이후 전국적인 민란으로 폭발했다. 이러한 민란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을 궁지에 몰아넣는 한편 그에 불만을 품고있던 조대비와 흥선대원 군의 밀약으로 고종의 즉위와 함께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의 막을 내리게 한다.

 

홍경래의난 : 세도정권에 의한 과거제도와 국가기강의 문란, 삼정을 통한 관리들의 횡포 등에 대항 하여 몰락한 양반과 지식인 등이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고 새로 등장한 부농과 사상인 들의 물력과 조직 력 등을 결합하여 10여 년간의 준비 끝에 일어난 것이다. 평안도 용강 출신인 홍경래는 본디 양반 출신 으로 과거에서 수 차례 떨어지면서 그것이 서북인 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대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과거를 포기한다. 홍경래의 난은 비록 성공 하지는 못했지만 이씨왕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새로운 정치 체제를 표방함으로써 조선 사회에 큰 타격을 가하여 그 붕괴를 가속화 시켰다.

 

순원왕후 김씨(1789-1857) :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창조인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 이다.


1800년(정조24년) 초간택,재간택을 거쳐 삼간택을 앞두었을 때 정조가 갑자기 죽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 왕후의 외척 김관주와 권유 등의 방해로 위기에 처하기도 하지만 마침내 1802년 왕비에 책봉된다. 순원왕후 김씨는 안동 김씨 일문의 집권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한때 세자비의 외척인 풍양조씨 일문 에게 정권의 주도권을 빼앗기다가 헌종 대에 이르러 다시 회복 하지만 헌종이 젊은 나이에 죽자 자손이 없는 헌종의 왕통을 누가 이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타났다.이때 정순왕후 김씨는 조대비 일문이 미쳐 손을 쓰기 전에 재빨리 원상에 권돈인을 지명하고 사도세자의 증손자인 강화도령 원범을 지목하여 왕위 를 잇게 한다. 또한 자신의 외가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에 책봉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은 대원군이 등장하기 까지 60여 년간 이어진다.

 

효명세자(1809-1830) :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서 났으며 3세에 왕세자에 책봉 되었으며, 1819년 영돈녕부사 조만영의 딸을 맞아들여 가례를 올렸다. 1827년 부왕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구현에 노력 했으나 대리청정 4년 만인 22세에 죽는다. 이때 그의 외척인 조씨일파가 대거 등용되어 안동 김씨 일파 와 정치적 세력 투쟁을 벌임으로써 정국이 혼란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제24대왕 : 헌종(1827-1849. 재위:1834-1849. 집권 14년7개월. 23세일기)

헌종은 순조의 손자이자, 효명세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 신정왕후 이다.
3세 때 왕세손에 책봉되고 1834년 순조가 죽자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린 관계로 순조의 비인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 하다가  헌종이 15세가 되던 해인 1841년 에야 비로소 친정을 하게 된다. 수렴청정이 끝나자, 안동 김씨의 세력이 다소위축 되면서 풍양조씨의 세력이 우세해 진다. 조대비의 부친인 조만영은 어영대장,훈련대장 등을 역임하면서 헌종을 보호하는 한편 그의 동생 조인영과 조카 조병헌 아들 조병구 등을 요직에 앉혀 세도를 확립한다. 그 후 5,6년 동안은 풍양조씨 일문이 현달 하드니 일문의 내부 알력과 1846년 조만영의 죽음을 계기로 정권은 다시 안동 김씨 일문 으로 넘어간다. 헌종 대에 정권을 잡아 안동 김씨를 견제한 풍양조씨 일문은 정치 혁신 대신에 안동 김씨와의 정권 경쟁에만 급급하여 민생 문제와 사회 문제를 도외시함으로써 사회적인 모순을 격화 시켰 다. 그 결과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물론이요,그로 인한 삼정의 문란을 초래했다. 헌종 대에는 사회가 불 안하고 민심이 이반되는 틈을 타서 모반사건 이 일어나는데, 헌종 2년에 있었던 남응준의 모반과 헌종 10년에 있었던 민진용의 옥이 그것이다. 별다른 정치적 세력도 없는 중인이나 몰락한 양반이 일으킨 두 모반 사건은 당시의 상황이 누구나 왕권을 넘볼 만큼 왕권이나 정치권이 우습게 여겨지고 있었다는 반 증 이기도 하다. 

 

헌종 12년 5월에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 체포되어,사교를 퍼뜨리고 국법을 어겼 다는 죄목으로 7월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에 처해진다. 헌종은 재위 기간동안 안동 김씨와 풍양조씨 일문의 권력 투쟁에 휘말리다가 적절한 민생 안정책도 세우지 못한 채 23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또한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정치력의 부족으로 적절하게 대응하거나 대비 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헌종은 두 명의 아내를 두었으나 1849년 6월6일 창덕궁에서 후사없이 죽었다.

 

신정왕후 조씨(1808-1890)  [조대비]: 효명세자의 비이며 헌종의 어머니로서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이다. 1857년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가 죽자 대왕대비가 되었으며 철종이 재위 13년만에 후사없이 죽자 왕실의 권한을 쥐게 되었다. 이때 조대비는 전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을 못마땅해 하던 흥성군 이하응과 조카 조성하와 손을 잡고 흥성군의 둘째 아들로 왕위를 잇게 한다. 또한 안동 김씨의 세력을 더욱 약화시키기 위하여 고종을 아들로 삼아 철종이 아니라, 효명세자의 뒤를 잇게 하였다.
1866년2월 까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실제 정권은 모두 흥선대원군이 잡도록 하교하고 있었다. 1890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떳다.


효현왕후김씨(1828-1843) : 김조근의 딸로써 헌종3년 왕비에 책봉.16세에 죽음.

 

효정왕후홍씨(1831-1903) : 철종이 즉위하자 대비.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딸.

 

제25대왕 : 철종(1831-1863년.재위:1849-1863년. 집권 14년6개월.33세일기.)

농부에서 제왕이 된 강화도령 원범이 철종이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의 손자이다. 1844년 헌종10년에 반역을 꾀한 민진용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의술로 은언군의 아들  이광과 (철종의 아버지) 은언군의 손자 원경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이원덕을 포섭하였다. 그들은 은언군의 손자이자 이광의 아들인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모의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모두 능지처참을 당 하고 마는데 이것을 ‘민진용의 옥’이라 한다. 여기에 연루되어 전계대원군 이광의 첫째아들 원경이 사사 되고 둘째아들 경응과 셋째아들 원범은 강화도로 유배된다. 이리하여 천애 고아가 된 두 사람은 강화도 에서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는 농사꾼으로 살던 중 5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원범에게 왕통을 이어라 는 교지가 내려진다. 그가 바로 철종이며 그 때 그의 나이 19세였으며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 였다.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는 손자인 헌종이 후사없이 죽자, 조대비의 척족인 풍양조씨 일파가 왕위를 세울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손을 썼다. 헌종의 6촌 이내에는 왕족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동 김씨 척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위해서는 헌종의 7촌 아저씨벌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1849년 왕위 즉위식을 올렸고 나이가 어리고 학문 을 연마 한 바없다는 이유로 1851년까지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철종이 21세 되던 1851년 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게 되었다.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하나 정치의 실권 은 여전히 안동 김씨에게 있었다. 1851년 철종의 장인이 된 김문근은 철종을 보필한다는 핑계로 거의 모든 국사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의 조카인 김병학이 대제학을 맡고 김병국이 훈련대장 김병기가 좌찬성을 차지함으로써 조정을 장악한다. 안동김씨 일문은 왕족 중에서도 나중에 왕위에 올라 자신들 의 권력에 위협이 될 만한 자가 있으면 미리 처단하기에 서슴치 않았다. 대원군의 형 이하전의  죽음이 그 예이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당시 철종은 이미 세도가의 첩자 등이 온 궁중에 퍼져 있었을 것으로 믿었고, 자칫하면 임금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철종은 이렇듯 계속되는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에 대항할 방법이 없자, 자연히 국사를 등한시하고 술과 궁녀들을 가까이 했다. 이렇게 되자 본래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었던 철종은 급속도로 쇠약해져서 1863년 재위 14년만에 33 세를 일기로 죽고 말았다. 혈육으로는 숙의범씨 소생의 영혜옹주 하나있음. 이렇듯 왕권을 배제시킨 세도정권은 정치적 견제없는 조건 하에서 삼정문란으로 나타나는 수탈정책의 극에 달함. 모든 법도가 안동 김씨에 의해 좌우되고 뇌물이 성행함은 물론 벼슬을 사고파는 매관 매직이 공공연히 이루어졌다. 관직을 산 수령들은 백성을 착취하여 그것을 벌충 하였고 이같은 수령의 부정에 편승한 아전들의 횡포 또한 백성 들의 고혈을 짜는 것이었다.  


철인왕후 김씨(1837-1878) : 1851년 15세의 나이에 왕비에 간택되어 궁으로 들어와 1858년 원자 를 낳았으나 곧 죽었다. 아버지 김문근과는 달리 말수가 적고 즐거움이나 성냄을 얼굴에 잘 나타내지 않는 등 부덕이 높은 것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제26대왕 : 고종(1852-1919년. 재위:1863년12월-1907년7월. 집권 43년7개월. 68세일기.)

고종은 1852년 흥선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 났다. 헌종의 모후 조대비에 의해 익성군에 봉해지고 1863년 12월 조선 제26대 왕으로 등극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12세임.


대원군은 둘째 아들 명복을 즉위시키기 위한 계략은 치밀했다. 안동 김씨 세력의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 해 건달들과 어울려 지내는가 하면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 다니며 구걸을 하기도 했다. 이같은 호신책 덕분으로 목숨을 부지한 그는 철종의 죽음이 임박하자, 조대비와 연줄을 맺어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려 한다. 조대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의 세도에 짓눌려 지내던 처지였기에 이하 응과 뜻을 같이하게 된다. 고종이 즉위하자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고 흥선군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하고 섭정의 대권을 그에게 위임 시켰다. 이로써 대원군은 고종을 대신하여 향후 10년 동안 권력을  지고 자신의 의지대로 정사를 운영하게 된다. 그는 우선 쇠락한 왕권을 되찾고 조선을 압박해 오는 외 세에 대적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정책을 추진한다. 우선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고루등용하고 당쟁의 근거지가 된 사원을 철폐하는 한편 토색을 일삼아 주구로 전락한 탐관오리들을 처벌하고 양반과 토호의 면세전결을 철저히 조사하여 국가재정을 충당했다.
민간의 부담을 줄이고자 무명잡세를 없애고, 진상제도를 폐지했으며, 악습을 개선하고  복식을 간소화 했으며, 군포세를 호포세로 변경하여 양반도 세금을 부담토록 했다. 

 

한편「대전회통」「육전조례」「양전편고」등의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를 확립시켰고 비변사를 폐지 하고 의정부를 부활시켜 삼군부를 두어 군국기무를 맡게 함으로써 정무와 군무를 분리시켰다. 
이처럼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재정을 확립했으며 세도정치의 폐해를  완전히 일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하지만 한편으로는 몇 가지 무리한 정책과 세계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지못한 채 지나친 쇄국정책을 폄 으로써 어려움에 처하기도 한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대원군은 더욱 쇄국정책을 펴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운다. 그러나 12세 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고종이 어느새 20세를 넘겨 성인이 되면서 친정을 원하고 있었으며, 1866년에 입궁한 민씨가 노대신들과 유림을[최익현의 상소] 앞세워 대원군 하야 공세를 벌렸다. 그래서 마침내 1873년 고종이 서무를 친히 결재하겠다는 명을 내리고 통치대권을 장악 하게 되자 대원군은 정계 일선 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정권은 왕비 민씨의 척족들이 장악했다.


병인양요-1766년.

신미양요-1771년

 

병자수호조약(1876): 고종13년에 일본과 맺어진 외국과의 최초의 수호조약. 부산.인천.원산 등 3개항    을 개항하도록 규정하는등 우리나라만이 갖는 일방적인 조약 이었다.운양호 사건으로 맺어짐.


임오군란(1882) : 구식 군졸에게 밀렸던 군량의 일부가 모래가 섞인 쌀로 주게 되자, 신식 군대인 별기군의 설치로 민씨일파에 대한 불만에 가득 차 있던 군졸들의 불평이 폭발하여 발생한 난으로 군졸 들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민겸호 등 민씨 일파를 죽였다. 대원군은 왕명을 위임받아 난을 수습하고 재집권 하였다. 이때 그는 명성왕후의 사망을 공포하고 다시 정국을 주도하려 했지만 명성왕후의 요청 으로 원세개가 이끄는 청국군이 개입함으로써 사태는 반전되어 청국으로 연행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그는 청에 연행되어 3년 동안 중국 바오딩에서 유수생활을 해야 했다. 임오군란으로 일본과 제물포 조약이 맺어지고 이 조약으로 일본 경비군의 조선 내 주둔이 실현되어 그 세력 기반을 굳혔다.


갑신정변(1884) : 개화당의 김옥균.박영호. 등이 중심이 되어 사대당인 민씨일파를 몰아내고 개화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일본의 힘을 빌어 우정국 낙성식에서 일으킨 정변으로 신정부는 청나라의 간섭 으로 3일만에 실패하고 김옥균.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한성조약 : 갑신정변으로 인한 일본인 피해자에게 배상금지불,일본공사관 재건비 등을 지불케 하는 등  일본이 식민지적 기반을 닦는데 더욱 박차를 가한 조약이다.


동학혁명(1894) : 고종 31년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불법착취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한 불만이 도화선되어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혁명이다. 혁명은 확대되어 봉건사회의 압박에 대한 농민 운동으로 변하여 기세가 걷잡을 수없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고종과 민씨세력들은 청에 원병을 청하였고 청이 이에 응하자, 일본 역시 그들간의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처럼 외세가 개입하자 농민군과 관군은 회담을 통해 화의를 약속하고 싸움을 중단하였다.조선에 진주 한 청.일 양 국군은 돌아가지 않고 일본이 청에게 함께 조선의 내정 개혁을 실시 하자고 제의 하였지만 청은 이제의를 거절했다. 이에 일본은 단독으로 조성의 내정개혁을  단행함과 동시에 조선에 주둔한 청 군을 공격하여 승리한 뒤 정식으로 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청.일전쟁은 두 달만에 구미 열강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갑오경장(1894) : 일본의 강압 아래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혁신 내각에서 재래의 정치 및 여러 문물제도를 근대적인 방식에 의해 실시한 개혁이다.
일본은 민씨정권을 몰아내고 흥선 대원군을 앉혀 꼭두각시 정권을 탄생 시킨 뒤 개혁 추진기구로써 군국기무처를 설치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일본이 바라는 것과는 달리 소신대로 개혁을 추진하려 하자, 은퇴를 강요당했고 김홍집이 중심이 되어 내정개혁을 단행한다.
개혁의 내용은 청과의 조약을 일체파기. 개국기년 사용. 관제 개혁.과거제 폐지.은본위제채택. 사회계급 의 타파. 노예해방. 조혼금지. 신교육실시 등 이다.

 

을미사변(1895) : 고종 32년에 미우라 일본공사가 친러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민비를 시해한 사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내정 간섭을 더욱 강화하고 승리의 대가로 받은 요동반도를 러시 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동맹군의 힘에 굴복해 다시 청에 돌려준 상태였다.이같은 정세를 감지한 조정은 배일 친러정책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아 내고자 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1895년 8월 대러 관계를 주도하고 있던 명성왕후를 시해하고 친일세력으로 하여금 조정을 장악하게 한다.

 

아관파천(1896) :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친러정부가 집정하면서 열강에게 많은 이권이 넘어가는 등 국가의 권익과 위신이 추락하고 국권의 침해가 심하여 독립협회를 비롯한 국민들은 국왕의 환궁과 자주선양을 요구하였다.

 

대한제국수립(1897) : 고종은 1897년 2월 환궁하였으며, 10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라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다.

 


을사보호조약(1905) :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이겨 포츠머드 조약에서 러시아로 하여금 한국에 있어 서의 일본의 특권을 승인케한후 이토 히로부미는 강압적으로 이 조약을 체결케 하여 한.일 합방의 기초 를 이루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주권을 잃고 외교권을 박탈 당했으며 일본은 서울에 통감부를 두고 보호정치를 실시하게 되었다.

 


을사오적 :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 등을 일컫는다.

 


헤이그 밀사사건(1907) : 을사보호조약에 의하여 일본에게 모든 실권을 빼앗기고 백성들이 극심한 착취와 탄압에 시달리게 되자, 고종은 1907년 6월에 네들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를 파견하여 우리나라의 상황을 호소하고자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이준.이위종.이상설)

 

한일합방(1910)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 인조의 셋째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인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다.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의 상태에서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21세가 되던 1841년 흥선정이 되었고, 1843년 흥선군에 봉해졌으며 1846년 수릉 천장도감의 대존관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의 한직을 지내면서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하에서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철종시대에는 안동 김씨가 권력을 독점하며 왕실과 종친에 갖가지 통제와 위협 을 가했으므로 호신책으로 천하장안이라고 불리는 시정의 무뢰한인 천희연, 하정일,장순규, 안필규 등과 어울려 파락호생활을 하였다. 또 이때 그는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 다니며 구걸도 서섬 치 않았기에 ‘궁도령’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그는 1863년 아들 명복이 왕위에 오르고 신정왕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서원정리, 무명잡세 폐지, 법전편찬, 비변사 폐지 등을 시행 하면서 안동 김씨의 세력을 눌러 왕권을 강화하고 외부적으로는 철저한 쇄국 정책 을 추진하였다.한편 경복궁의 무리한 중건과 지나친 쇄국정책으로 인한 천주교박해 등으로 말미암아 안팎으로의 어려 움이 초래되기도 했다.


명성황후 민씨(1851-1895)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이며,8세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이 되었으며,흥선 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에 간택되어 1866년 고종과 가례를 올리고 입궁하였다. 그녀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순전히 배경이 미흡하여 외척의 득세 가능성이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왕비 민씨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수완이 능란 하였기에 왕비에 오른 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왕실 정치에 관여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민씨는 시아버지 흥선 대원군과 정적 관계에 놓였고 결국 그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민씨와 대원군의 사이가 벌어진 직접적인 원인은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 난 왕자 완화군을 대원군이 편애하여 세자로 책립 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배후에는 민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 세력과 새로 등용된 남인과 일부 북인을 중심으로 한 세력간의 정치적 갈등이 작용하고 있었다. 1873년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은 실각하게 된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그녀는 '친청'정책을 실시하였는데,이 때문에 개화파의 불만이 높아져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일시적으로 개화당 이 정권을 장악하지만  민비는 청국군의 도움으로 3일만에 정권을 되찾는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그 녀는 시해됐고 시체를 불사르는 등 천인 공로할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고종으로 하여금 민비를 폐위 하여 서인으로 전락 시키도록 강요했다.

 

영왕(영친왕) 이은(1897-1970) : 고종의 넷째 아들이며 순종의 이복 동생이다.
1900년 8월에 영왕에 봉해졌고 1907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그 해 12월 조선 총독이토 히로부미
에 의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 갔다. 1920년 일본황실의 내선일체 정책에 따라 일본 왕족 나시모토의 맡딸인 마사코(이방자 여사)와 정략 결혼했다. 1926년 순종이 죽자 형식상으로 왕위 계승자가되어 이 왕으로 불리었으나 일본에 머문 채 귀국하지 못했다. 일본에 강제 체류하는 동안 철저 한 일본식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육군 사관학교, 육군대학을 거쳐 육군중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제27대왕 : 순종(1874-1926년. 재위:1907년3월-1910년. 집권 3년 53세일기.)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이후 일본은 고종을 강제퇴위 시키고 순종을 등극 케 한다. 이후 순종은 일본의 탄압에 밀려 별다른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군대를 해산 당하고 사법권을 강탈당하는 등 숱한 수모를 겪는다. 그리고 일본은 친일세력 이완용,송병준,이용구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매국단체인 일진회 를 앞세워 조선인이 원함에 따라 조선과 일본이합병 한다는 논리로 1910년 한일합방조약을 성립시켜 대한제국을 멸망케 했다.
순종은 황제의 위치에서 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머물렀다. 일본은 그를 이 왕이라 불렀고 왕에 해당 하는 대우를 해주면서 왕위의 허호는 세습되도록 조처했다. 순종은 폐위된 후 16년 동안 창덕궁에서 머물다가 1926년 4월25일 53세 를 일기로 한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두 명의 황후를 맞이했으나 슬하 에 자식은 없었다. 이로써 조선은 27왕조 519년 역사의 막을 내린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국장일 을 맞이하여 6.10만세운동이 일어난다.


순정효 황후 윤씨(1894-1966) :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이다.


순종의 첫 번째비 순명효항후 민씨가 1904년에 사망하자 1906년12월 황태자비에 책봉되어 입궁했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될 때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 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이를 저지하고자 치마속에 옥새를 감추고 내놓치 않았다 한다. 하지만 숙부인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말았다. 1966년 71세를 일기로 낙선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하였다.

   
고종의 자손들

 

조선의 26대 임금이자 초대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황제는 모두 6남 1녀의 자손을 둡니다. 먼저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순종황제', 귀빈엄씨 사이에서 '영왕', 귀빈이씨 사이에서 '완왕'과 '육',귀빈장씨와의 사이에서'의왕', 귀인정씨와의 사이에서 '우',귀빈양씨와의 사이에서 '덕혜옹주' 등, 총7명의 부인에게서 6남 1녀의 자손이 있었지만 무사히 성장하여 결혼까지 한 자식은 3남 1녀에 불과합니다. 


- 고종의 장자(長子)였던 순종황제와 황제비인 순명효황후와 순정효왕후 사이에 자손이 없습니다.

(즉, 조선왕조의 적통은 끊긴 것입니다.)

 

-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로, 왕세제이자 황태자였던 영친왕과 비(妃)인 일본의 황족 이방자 (마사코)   여사 사이에는 '진(晉)'과'구(玖)' 2명의 왕자가 있었지만 첫째 왕자 '진'은 막 돌을 넘기던 때 죽고었다. 현재 둘째 왕자 '구'는 일본과 한국을 왕래하며 생활하고 있으며 한때 '줄리아 뮬럭'이라는 미국 여성과 결혼을 한 적이 있었지만, 이내 이혼하였고 슬하에 자식은 없습니다.


- 고종의 다섯째 왕자였던 의친왕의 자손은 매우 많았습니다. 의친왕이 워낙 활달한데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 가지 않았고 미국으로 유학까지 가셔서 외국인과의 사이에도 낳은 자손까지 있습니다. 
의친왕은 부인을 여럿 거느리는 옛 왕가의 풍습도 풍습이지만, 남달리 수려한 용모 때문에 염문이 그칠 새가 없었습니다.  
당호(堂號)가 내려진 부인만 7명이었고, 도합 14명의 여성에게서 모두 13남 9녀의 소생을 보았습니다.


의친왕의 자손들은 아주 많은데 현재 생존하고 계시는 분들을 살펴보면 "비둘기 집"이라는 노래를 부른 가수로 알려진 의친왕의 11번째 자손'이석 공(公)'과 "나의 아버지 의친왕"이라는 책을 쓰신 의친왕의 13번째 자손'이해경 옹주'등 여러 분이 생존해 계십니다. 몇 년전 궁중에서 궁중식으로 전통혼례를 치르겠다고 문화재청에 요청했다가 거부당한 공주는 의친왕의 11번째 자손인 '이석 공(公)'의 장녀 이홍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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