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 새야 새야 파랑새야 "SBS 녹두꽃"

2019. 5. 12. 18:55역사

새야 새야 파랑새야 (청나라 군대, 일본군)

녹두밭에 앉지 마라 (농민군을 잡지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전봉준이 사망하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우리 백성이 슬퍼한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주고부 녹두새야

어서 바삐 날아가라

댓잎솔잎 푸르다고

하절인 줄 알았더니

백설이 펄펄

엄동설한이 되었구나

 

녹두밭(농민군), 녹두꽃(녹두장군 전봉준)을 의미합니다.

파랑새(청나라 군대,일본군)가 녹두밭(농민군)에 앉으면(잡으면)

녹두꽃(전봉준)이 떨어지면(죽으면) 청포장수(우리 백성) 울고간다

동학 농민 운동(1894) 때에 일본군이 푸른색 군복을 입어 파랑새는 일본군을 뜻하며 전봉준이 녹두장군이라 불리었던 점을 보아 녹두밭은 전봉준,동학농민군을 상징하고 청포장수는 백성을 상징한다는 것이 유력하다.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동학 혁명(東學革命), 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 또는 동학 농민 전쟁(東學農民戰爭)은 1894년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 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백성의 무장 봉기를 가리킨다.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제 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제 2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제 3차)로 나뉜다.

 

교조 최제우의 신원 외에도 기존 조선 양반 관리들의 탐학과 부패, 사회 혼란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가, 1892년(고종 19년)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와 남형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 그리고 동학 교조 신원 등의 기치로 일어선 동학농민군 중 일부는 흥선대원군이준용 등과도 결탁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명성황후와 민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다. 대원군 역시 명성황후의 제거를 위한 무력 집단이 필요했고, 동학농민군과 제휴하게 된다. 동학농민군 중 일부는 탐관오리 처벌과 개혁 외에 대원군의 섭정 까지도 거병의 명분으로 삼은 바 있었다.

 

한편 흥선대원군과의 연대를 못마땅히 여긴 김개남은 수시로 전봉준과 충돌하다가 독자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방언은 농민운동 진압 직후 흥선대원군이 특별히 사면을 청하여 석방되었으나 민씨 계열의 관군에 의해 살해된다. 그밖에 최시형손병희 등 북접의 지도자들은 남접의 거병에 쉽게 호응하지 않다가 그해 9월의 3차 봉기 때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편 개화파 지도자이자 망명정객인 윤치호는 동학 농민 운동을 적극 지지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초기에는 동학난동비의 난 으로 불리다가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농민운동(甲午農民運動),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씨 정권에서는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번갈아 끌어들여 결국, 농민 운동 진압 후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전봉준

전봉준(全琫準, 1854년 ~ 1895년 4월 24일(음력 3월 30일))은 조선의 농민 운동가이자 동학의 종교 지도자였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의 남접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본관은 천안(天安), 초명은 명숙(明淑), 다른 이름은 영준(永準)이며 호는 해몽(海夢)이다. 녹두장군(綠豆將軍)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키가 작아 붙여진 별명이다.

1890년대 초 한때 흥선대원군 문하의 식객으로 있었다. 1894년 2월 15일 고부에서 탐관오리인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1차 봉기를 주도하였으나 조정의 회유책으로 해산했다가, 3월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李容泰)가 동학 농민군을 도적으로 규정하여 동비(東匪)라 칭한 뒤, 동학군과 협력자를 처벌, 처형하고 관련없는 농민들까지 동비로 몰아 처단하자 다시 봉기를 일으킨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온건파 지도자들 중의 한사람이자 농민군의 북접을 지휘하였으며, 거사 과정에서 흥선대원군과도 내통하여 연결을 시도했다.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생으로 오늘날의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로 추정한다.

 

사발통문 - 동그란 부분이 이름을 써 놓은것인데, 어디가 첫번째인지 마지막인지 알 수 없어 주동자를 알아보기 힘들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인내천(人乃天)

전봉준이 농민을 위하여 부러 짓은 사상은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고 외치며 양반과 상민을 차별하지 않고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대하고 또 노비 등 천민들이 해방된 이상사회를 지향하며 등장했던 동학사상. 이는 천도교(天道敎)의 중심 교리이기도하다.

 

인내천 사상이 사람 이외에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는 식으로 신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성령(聖靈)과 지기(至氣)를 주체로 하는 ‘영육쌍전(靈肉雙全)’을 내세워 경천(敬天)·경인(敬人)·경지(敬地)를 주장함으로써 하늘과 땅과 사람을 일체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신관(神觀)에서 비롯된 이 교리는 인간을 누구나 평등하게 보고, 근본적으로 귀천이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한다.

 

사람마다 ‘한울님(하느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사람 대하기를 한울님과 같이 여겨야 한다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이 천도교의 행동실천 요강(要綱)이다. 자신의 한울님을 모신다는 말은,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한울님의 심기(心氣)를 바르게 기름으로써 한때 잃어버렸던 한울님을 되찾아 모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양천주(養天主)’(하늘을 봉양함. 곧 하늘을 부모와 같이 봉양하매, 하늘님의 명을 자심(自心)에서 기르며, 모든 일을 하늘님의 뜻대로 행함.)라고 한다. 이와 같이 자신의 한울님을 기르는 방법은 서양의 종교가 하느님께 예배하면서 참회하고 속죄하는 의타적(依他的)인 방법인 데 반하여 자신의 심기를 수련하는 의자적(依自的)인 방법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다른 종교와 다른 특징이다.

 

 

당시의 농민들은 이 동학사상을 모태로 하여 서로 똘똘 뭉쳐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동학농민전쟁’을 일으켰다 결국은 실패하였다. 오늘에 와서 새삼 ‘새야 새야’를 떠올리는 건 사실, 내 가슴속으로 쿵하고 들어와 버린 전봉준 장군에 대한 애틋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 종교사상 불세출의 의인이었던 박태선 장로라는 분이 있었고 그 분의 당시 부흥회 설교말씀이 생각난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혼돈하던 1956년도 인간은 자유율법(양심의법)을 지켜나가면서 축복한 생수를 먹으면 인간이 죽음에서 벗으나 영생할 수 있다는 신의 경지 말씀으로 종교계에서 심한 박해와 핍박을 받았다. 그런데 2010년도 인간의 수명은 연장되고 있으며 2050년도 영생물질이 나올 수 있다는 기사를 보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부패하고 암담한 시대 위대한 사상적인 슬로건을 내걸고 외친 선지자들이나 의인들이 무수히 이 땅에 왔지만 그 시대 사람들의 무지나 당대의 정치권력 또는 최 측근들의 부패와 무능과 배신으로 큰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평가도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를 수없이 보고 있다.